[인터뷰] 남정호 국립현대무용단장
온라인 공연으로만 관객 만난 1년
유튜브·틱톡 등 ‘집콕 예술’ 콘텐츠로
‘현대무용은 난해’ 편견 깨려 노력
“비대면·온라인, 피할 수 없다면 숙명 삼아
예술성도 대중성도 다 잡겠다”

국립현대무용단이 2020년 6월 유튜브에서 초연한 ‘비욘드 블랙’ ⓒ국립현대무용단/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이 2020년 6월 유튜브에서 초연한 ‘비욘드 블랙’ ⓒ국립현대무용단/Aiden Hwang

#1. 검은 스크린 속, 인간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AI)가 춤을 춘다. 옆에선 무용수들이 불규칙적이고 유연하게 몸을 움직인다. AI가 자동학습으로 짠 안무다. 국립현대무용단이 2020년 6월 유튜브에서 초연한 ‘비욘드 블랙’이다. 인간과 AI의 만남이 23분짜리 춤 공연으로 탄생했다. 예술성을 인정받아 영국과 러시아 등에서도 초청 상영됐다.

#2. 이번엔 생존 게임. 흰옷 차림의 무용수 14명이 즐겁게 춤춘다. 하나둘씩 탈락해 무대에서 끌려나간다. 검은 옷을 입은 탈락자들은 무대 밖에서 생존자들을 지켜보다 야유하기도 하고, 탈락자가 나오면 달려들어 끌어낸다. 2020년 10월 국립현대무용단의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는 ‘각자도생’의 한국 사회를 춤으로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자유로운 현대무용의 에너지를 보여줬다. 네이버 TV·유튜브를 통해 공개됐다.

국내 코로나 발생 1년간 무용계는 고민이 깊었다. 무관중 온라인 공연을 넘어, 비대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시도가 이어졌다. 그 선두에 남정호(68) 단장이 이끄는 국립현대무용단이 있다. 한 해 동안 파격적인 시도를 거듭하며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았다는 호평을 받았다.

남정호(68) 국립현대무용단장. ⓒ국립현대무용단/BAKI
지난 1년간 무용계에서는 비대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시도가 이어졌다. 그 선두에 남정호(68) 단장이 이끄는 국립현대무용단이 있다. ⓒ국립현대무용단/BAKI
국립현대무용단이 2020년 10월 유튜브와 네이버TV에서 공연한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 ⓒ국립현대무용단/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이 2020년 10월 유튜브와 네이버TV에서 공연한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 ⓒ국립현대무용단/Aiden Hwang

남 단장은 비대면·온라인이 무한한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본다. 올해도 댄스 필름 5편을 제작하고, 젊은 안무가들을 지원하는 ‘안무랩’, 디지털 테크놀로지 접목을 지원하는 ‘기술X예술 융합 활성화 사업’ 등을 추진하는 이유다.

“올해는 (비대면·온라인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더 발전시킬 계획입니다. 공연은 무대예술이고 영상은 기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영상에 집중해보니 오히려 작품을 자산으로 남겨 오래 보존할 수 있더군요. 해외 교류가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의 공연을 외국에 알릴 기회가 되고요.”

온라인은 ‘현대무용은 난해하다’는 편견을 깨고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장이다. 지난해 국립현대무용단이 틱톡에 올린 춤 영상, SNS 셀럽과 무용수의 ‘춤 대결’ 등 5개 영상 누적 조회수는 325만을 넘겼다. 유튜브엔 85회의 자체 기획공연과 무용 영상을 올렸다. 현대무용 지식을 전달하는 ‘춤추는 강의실’ 시리즈가 인기다. 이날치밴드와의 협업으로 유명한 김보람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안무가의 특강 영상은 조회수 63만에 달한다. 남 단장이 직접 홈트레이닝 방법을 알려주는 ‘유연한 하루’도 조회수 8만6000회을 기록했다. “이런 시도 너무 재미있다” “현대무용에 관심이 생겼다, 다음 공연이 기대된다”는 젊은 관객들의 댓글이 눈에 띈다.

남 단장은 소위 ‘엘리트’ 무용과 대중성을 모두 사로잡는 ‘투 트랙’ 전략을 내세웠다. “제가 1980년대에 프랑스 유학을 갔을 때 예술가들은 물론 일반인들이 현대무용에 열광하는 걸 보고 놀랐어요. 우리나라 사람들도 현대무용에 꽤 관심이 많아요. 미래적, 동시대적 예술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점점 늘고 있어요. 우리 무용단이 화답해야죠. 다양한 몸짓, 철학적 사유가 깃든 몸짓도 보여드릴 겁니다. 재능 있는 안무가들을 초청해서 대중과 만나는 ‘살롱’ 프로그램은 올해도 선보일 계획입니다.”

12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내 집무실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 중인 남정호 국립현대무용단장. ⓒ홍수형 기자
12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내 집무실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 중인 남정호 국립현대무용단장. ⓒ홍수형 기자

올해 대면공연 8편...첫 공연은 대표 안무작 ‘빨래’
힘들어도 함께 버티는 여성 연대·낙천성 주목 
“춤은 젊음의 전유물? 80대에도 춤 추는 게 현대무용
생의 끝까지 무대 서고파”
자기관리 비결은 요가·명상·호기심

남 단장은 1980년 프랑스 장-고당 무용단(Cie Jean-Gaudin) 단원으로 활동했다. 돌아와 부산 경성대 무용학과 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교수를 거쳐 2020년 2월 국립현대무용단장에 올랐다.

감염병과의 공존은 부임하자마자 던져진 과제였다. 지난해 무용단 창단 10주년을 맞아 “아주 재미난 것들을 준비”했지만 아쉽게도 조용히 생일을 보내야 했다. 당장 공연 수입이 사라진 무용수들의 생계도 문제였다. 국립현대무용단엔 전속무용수가 없다. 프로젝트마다 무용수를 선발하는 식이다. 남 단장은 “비대면 공연에 참여하는 무용수들에게도 대면 공연과 비슷한 수준의 대우를 보장하고 있다. 공연이 취소돼도 연습한 만큼 사례비와 보상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19일 개막하는 국립현대무용단 2021년 첫 공연 ‘빨래’ 연습 현장. ⓒ국립현대무용단
19일 개막하는 국립현대무용단 2021년 첫 공연 ‘빨래’ 연습 현장. ⓒ국립현대무용단

올해는 대면 공연을 재개한다. 예년보다 많은 8편을 기획했다. 첫 공연은 19일 막을 올리는 ‘빨래’다. 남 단장의 대표 안무작이다. 1993년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개관기념 초연 후 약 20년 만에 돌아왔다. 한여름 밤, 더위에 잠 못 이루는 여성들이 모여 빨래를 한다. 천대받던 가사노동을 성스러운 정화의 의식, 여성 연대의 몸짓으로 해석했다. 

“외국에서 안식년을 보낼 때, 숙소 세탁기가 고장 나 손빨래를 했어요. 옷가지만이 아니라 마음이 깨끗해지더군요. 빨래, 정화를 생각하다가 이 작품을 구상했죠. 우리 조상들에게 빨래는 단지 힘든 노동이었을까요? 빨래터는 여자들의 은밀하고도 사교적인 장소가 아니었을까요? 다른 여자들과 만나 어울리고, 함께 힘을 모아 산더미 같은 빨래를 해내고, 힘들지만 살아가기 위한 에너지를 얻는 공간이 아니었을까요?”

변화도 있다. 봉산탈춤에 등장하는 ‘미얄할미’가 등장한다. 갖은 고생 끝에 집 나간 영감을 찾아내는 인물이다. 그 끈기, 낙천성, 해학성에 주목했다. “여자의 삶이 쉽지 않죠. 그래서 미얄할미의 존재와 그 계보가 흥미로워요. 여성들은 이 작품에 훨씬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안무가도 무용수도 여자, 미얄할미도 여자니까요.”

남 단장의 기억 속 가장 아름다운 춤도 여성들의 춤이다. 자유와 혁명의 아이콘, 이사도라 덩컨은 지금도 그의 우상이다. 어머니의 춤사위도 잊을 수 없다. 고운 한복을 입고 북소리에 맞춰 다른 여인들과 춤을 추던 젊은 시절의 어머니. 오페라 가수를 꿈꿨던 어머니. 그 피를 물려받아서인지 자식들은 ‘남트리오’ 예술가 가문을 이뤘다. 한국의 대표적 마이미스트 남긍호씨,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현대무용가 남영호씨가 남 단장의 동생들이다. 

이제 그는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어긋남이 없다’는 ‘종심(從心·70세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에 가까워지고 있다. 무용단을 이끌기 전까지 계속 무대에 섰고,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나의 춤을 추려고 한다”고 했다. “춤은 젊음의 전유물일까? 발레는 그렇죠. 현대무용에서는 경험이 많고 몸을 잘 다루는 무용가도 많아요. 일본의 어느 부토(舞踏) 안무가는 80대에도 춤을 추죠. 세계적인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 머스 커닝햄, 피나 바우시도 생의 끝까지 무대에 서고 싶어했어요. 저도 그래요. 춤출 때 온전해져요.”

작가로 데뷔하고픈 마음도 있다. “어릴 때 문예부도 들 정도로 관심이 많았어요. 한예종 퇴임하고는 신춘문예에 낼 단편소설도 준비했어요. 너무 바빠서 손을 못 대고 있지만 제 관점, 경험과 생각을 쓰는 게 즐거워요. 저라면 진짜 멋지고 재미있는 드라마를 쓸 수 있다는 자신, 아직도 있어요. 하하하.”

불확실한 시대, 선배로서 그는 후배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저는 춤추다 보니 건강해졌어요. 인격 수양에도 큰 도움이 되죠. 춤 기술을 내 것으로 만들고, 무대에서 여러 역할을 표현하려면 꾸준한 연습과 인내가 필요하니까요. 본인이 좋고 즐거워서 춤을 췄으면 좋겠고요. 익숙한 것도 호기심을 갖고 새로운 면을 찾으려 해보세요. 일상을 정돈하는 습관도 좋아요. 침구를 단정하게 정돈하듯이, 힘들다는 핑계로 함부로 대했던 가족에게 사랑을 담아 말을 건네듯이, 소소하게 여겼던 것들을 돌아보세요.”

가장 궁금했던 건 5시간 이상 연습한 직후에도 온화한 미소와 태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인터뷰에 응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아침에 1시간 정도 일찍 일어나서 요가와 명상을 해요. 많이 걷고요. 저는 빨래 등 집안일도 스스로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물음표와 느낌표예요. 내가 만나는 사람, 사물에 관심을 갖고 교감하는 것. 그게 재미있게 즐겁게 살아가는 힘이 돼요. 별거 없죠? 하하.”

 

남정호 국립현대무용단장은

국립현대무용단 단장 및 예술감독 (2020~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교수 (1996~2018)
현대무용단 ‘Zoom’ 창단 및 창작활동 (1985~1996)
부산 경성대학교 예술대학 무용학과 교수 (1982~1996)
프랑스 장-고당무용단(Cie Jean-Gaudin) 무용수 (1980~1981) 
프랑스 렌느2(RennesⅡ)대학 박사과정(D.E.A)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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