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월간지 <프리미어> 편집장

기자 시절, 언론계 내부의 성차별 문제를 절감한 또래의 몇몇 여기자들과 '백장미 결사'라도 조직하자고 머리를 맞댄 일이 있었다.

당시 여기자클럽이 있었지만 그 모임 소속의 선배들은 여성 언론인, 특히 여기자 후배들의 권익을 위한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지 않았고, 영부인 초청 청와대 오찬 따위에 초청받는 창구로 이용되는 등, 후배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몇몇 난초 여성언론인의 사교모임으로 폄하돼 있었다. 인맥 학맥 등 무형의 프리미엄이 전혀 없는 단독자 여성의 입장에서 “나 정치부 보내줘, 사회부 보내줘”하기 어렵고 보면, 인사철에 편집국장 앞으로 “여기자를 주요부서에 전면배치하라”는 요지의 성명을 보낸다든가 하면 얼마나 일생에 도움이 되었겠는가. 역량 있고 적극적인 선배들의 집단의사표시가 아쉽기만 했다. '백장미 결사'는 결국 몇 가마니 분량의 분기탱천한 수다를 곁들인 몇 번의 술자리로 끝나고 말았다.

언론사간의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소속사의 이해를 넘어선 결속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기자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24시간을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는 데 투자해야 했고, 따라서 '여성으로서의 우리'는 늘 뒷전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저런 장애를 뛰어넘어 우리가 모일 수 있으려면 누군가 자신을 희생하고 오로지 그 목적을 위해 나서줘야 했는데, 잘해야 본전이요 밑지면 끝장인, 정치적 저의를 의심받을 뿐만 아니라, 언론인으로서의 미래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무상의 조직활동가를 자청하기에는, 우리 모두 자신이 몇 안되는 여기자라는 사실이 주는 자부심에 지나치게 배가 불렀고, 너무도 모래알이었다. 여성의 집단화, 정치세력화는 결코 쉽지 않았다. 대의 앞에서 작은 차이를 버무리는 훈련도 되어 있지 않았고, 순결주의는 디테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낳았다. 누군가는 손해를 봐야 했는데, 아무도 그러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당시 '여성권익이라는 대의 앞에서는 어떤 차이에도 눈을 감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다짐했다. 72년의 장준하가 “모든 통일은 옳다” 했던 것처럼, 난 당분간 “모든 여성운동은 옳다”고 생각하기로 했고,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선은 모여야 한다고, 말이다.

대세에 밀려서든 각성에 의해서든 여성인력을 부르는 정계의 손짓이 다급해지면서, 어떤 여성이 어떤 방식으로 정계에 투신하는 것이 옳은가를 두고 또다시 여성 내부에서 논란이 벌어진다.

이계경 여성신문 전 사장의 미완의 한나라당행이 불러온 격한 반발에 이어, 이오경숙 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가 열린우리당의 이경숙 공동대표로 명함을 바꾸는 과정도 당사자나 주변이나 다 적지 않게 마음 고생하고 있는 것 같다.

시비는 가려야 하고, 토론은 많을수록 좋지만, 모든 경우에 결단과 선택에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선택하기에 완벽한 조건이란 없다. 나는 더 많은 여성들이 결단과 선택 앞에서 용감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실패로 판명나더라도, 몰매를 맞더라도, 다수를 의미있는 실패는 혼자만의 성공보다 낫고, 필요한 매라면 맞아야 한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