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남 개인전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여성 독립운동가 14인 초상화·설치 작품
학고재 갤러리서

윤석남 화백이 일제와 맞서 싸웠던 용감한 여성 독립운동가를 초상화로 살려냈다.  참혹한 일제시대 무장투사로 지원자로 온 몸을 던졌던 투사들이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윤석남 화백의 여성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화가 전시된 학고재 갤러리는 비장한 결기를 담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도포와 피로 물든 듯한 붉은 상자가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분노와 슬픔을 깊이 억누르는 강렬한 표정의 여인이 세로 210㎝, 가로 94㎝의 대형 화폭을 꽉 채운 풍채로 서 있다. 왼쪽 상단에 그려진 남성은 단재 신채호다. 그의 유골함을 들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이 그림의 주인공은 독립운동가이자 신채호의 아내, 박자혜(1895~1943)의 초상이다. 

학고재갤러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박자혜' 초상.  ⓒ학고재갤러리
학고재갤러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박자혜' 초상. ⓒ학고재갤러리

신채호 선생은 알아도 박자혜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조선총독부의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다 3·1운동 당시 부상자들을 치료하며 민족적 울분을 느끼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의열단의 동양척식회사 폭파 거사를 돕는 등 투쟁에 힘을 보탰고, 두 아이를 키우며 남편을 옥바라지했다. 남편이 감옥에서 죽은 뒤 둘째 아들마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고, 해방 2년을 앞두고 그 역시 병으로 눈을 감았다. 

한국의 대표적 여성주의 미술가, 윤석남(83) 화백이 박자혜를 비롯한 여성 독립운동가 총 14인의 삶을 그림으로 복원해냈다. 사료로 남아있는 사진과 자료를 참조해 세필(細筆) 연필 드로잉을 제작한 뒤 한지 위에 채색화로 상상을 덧대 그리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그렇게 강주룡, 권기옥, 김마리아,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옥련, 남자현, 박자혜, 박진홍, 박차정, 안경신, 이화림, 정정화, 정칠성 등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화가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를 가득 채웠다. 남성 중심적 역사 속에서 빛을 보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생생히 복원한 윤 화백의 개인전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를 구성하는 일견 낯선 이름들이다.

*** ⓒ홍수형 사진기자
윤석남 화백의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가 열리는 학고재갤러리 전시장. ⓒ홍수형 사진기자

이번 전시는 윤 화백의 벗이자 역사를 전공한 김이경 작가가 함께 연구하고 작업한 결과물이다. 김 작가가 사료를 정리해서 인물의 삶을 글로 써내면 윤 화백이 글을 토대로 상상력을 덧붙여 그림을 그렸다. 현재까지 알려진 2000명 넘는 여성 독립운동가 중에서 다양한 독립운동 방식을 고려해 14인을 추렸다. 김 작가는 전시 개막에 맞춰 동명의 책을 출간했다. 

윤 화백은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얼굴을 비롯해 독립운동의 방법을 알려주는 상황의 묘사나 단서를 통해 각자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특히 눈을 통해 내면의 기운이 전달된다고 생각해 인물마다 눈을 생생하고 강렬하게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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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 저고리를 입은 채 왼팔을 치켜든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2~1944)의 초상화. 손이 크고 투박하게 표현돼있다. ⓒ홍수형 사진기자

또 행동의 실행 수단으로서 손을 크고 강인하게 그려냈다. 윤 화백은 “손은 사람이 가장 많이 쓰는 부위이자 가장 동물적인 부위이기도 하다”라며 “손은 삶을 가장 진솔하게 보여줄 수 있다. 힘들게 살아온 이분들의 인생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 관람객 박명숙(59)씨는 “(그림 속) 손에서 삶이 느껴지는 듯하다”라면서도 ”거의 다 처음 듣는 이름들이다. 그동안 왜 이분들이 잊혀졌고 사장돼 있었을까?”라고 물었다.

임신한 몸으로 평남도청 등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1888~?)의 머리 위에는 파랑새가 앉아있다. 윤 화백이 상상해 그린 요소다. 여성 독립투사로는 최초로 사형 선고를 받고, 어렵게 낳은 아들이 영양실조로 눈이 머는 등 비극을 거듭 겪었지만, 윤 화백은 “(안경신 열사를) 떠올릴 때마다 굉장히 희망적인 태도를 느낀다”고 했다. 총독부와 일본 황궁을 폭파하기 위해 중국군 비행대에서 복무한 한국의 첫 여성 비행사 권기옥(1901~1988), ‘상하이 임시정부의 안주인’이라 불렸던 정정화(1900~1991) 등 다양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초상에도 윤 화백의 상상이 가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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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구가 작았다고 알려진 독립운동가 안경신의 초상. 머리 위에 희망과 꿈을 상징하는 파랑새가 앉아 있다. ⓒ홍수형 사진기자

전시장에는 무수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상징하는 ‘붉은 방’이 있다. 종이 콜라주 850점과 거울 70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얼굴 일부를 그려 추상화한 나무 조각 50개로 구성한 설치 작품이다. 윤 화백에 따르면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일종의 추모 공간”이다. 

전시의 마지막 공간인 '붉은 방'은 윤석남 화백이 이름 없는 무수한 여성 독립운동가를 추모하는 의미로 제작한 대형 설치 작품이다.  ⓒ홍수형 사진기자
전시의 마지막 공간인 '붉은 방'은 윤석남 화백이 이름 없는 무수한 여성 독립운동가를 추모하는 의미로 제작한 대형 설치 작품이다. ⓒ홍수형 사진기자

윤 화백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찾아간 이들”이라고 봤다. 김 작가도 이번 작업이 ‘애국’으로만 소비되지 않기를 바랐다며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이란 조선 왕조라는 나라를 되찾는 게 아니라, 여성도 당당한 주인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다고 본다. 이들에게는 여성해방, 독립, 민족해방이 하나로 연결되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 화백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초상을 지속해서 그려나갈 계획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100인을 채우는 게 목표다. 늠름하고도 비장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림 옆에 적힌 삶과 투쟁을 읽다 보면 뜨거운 역사를 새롭게 알게 된다. 

벽에 걸려있는 14인 외에 그가 그린 오광심, 이병희, 조신성, 김향화, 동풍신, 부춘화, 윤희순, 이화경 등 8인의 초상화는 학고재 온라인 전시 공간 '오룸'에서 감상할 수 있다. 전시는 4월3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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