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웹툰 ‘참교육’ 계기로 본
미디어가 재현한 청소년의 삶
학폭 혹은 연애 위주...과도한 낭만화·일반화
실제 청소년의 삶과 목소리에 주목해야

웹툰 '참교육' 중 한 장면 ⓒ아수나로 페이스북 페이지
웹툰 '참교육' 중 한 장면 ⓒ아수나로 페이스북 페이지

최근 체벌금지법의 ‘필요성’을 내세우며 체벌하는 교사와 ‘맞을 짓’하는 청소년들의 이분법적인 구도를 자극적인 내용으로 녹여 낸 네이버 웹툰 ‘참교육’이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교권을 체벌을 통해 되찾을 수 있다는 가치관에서 비롯된 언행이나 자극적인 처벌을 액션처럼 그려낸 방식 등 여러 논란 지점을 찾을 수 있지만, 사실 내용을 깊이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이 웹툰은 어딘가 이상하다. 현대의 학교라는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어딘가 현실성이 부족하고 괴리감이 느껴진다.

그 이유는 웹툰 내에서 묘사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웹툰 특성상 등장하는 청소년들은 모두 학생들이다. 이 학생들은 소위 ‘맞을 짓’을 하는 ‘요즘 애들’이다. 그런 학생들이 우리에게 낯선 모습은 아니다. 이미 여러 학원물 웹툰과 드라마 등에서 숱하게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우리가 아는 학교와 학생들의 평균적인 모습이 웹툰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가? 그들은 어른들의 머릿속에서 자극적이고 편리하게 곡해된 하나의 ‘이미지’는 아닌가?

현실의 학교 폭력과 학교 내 군기 등 학생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자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도 분명 안타까운 사건들이 숱하게 발생하고 있고, 이는 큰 사회적 문제이다. 그러나 제작자들이 폭력을 창작물의 요소로 삼아 그 심각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폭력, 특히 피해 장면을 자극적이고 통쾌하게 그려내 액션물처럼 보이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는 그것이 학교의 전부, 학생의 전부가 아님에도, 제작자들은 학교폭력 등을 자극적인 하나의 요소로 골라내어 자신의 창작물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의 ‘이미지’, 누가 만들었는가?

웹툰 ‘참교육’만이 문제는 아니다. 미디어는 청소년을 표현하고, 표현된 청소년을 학습해 그대로 다시 표현하고, 쉽게 이미지화해버리곤 한다. 청소년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현실의 청소년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미디어에서 표현하는 청소년의 언어가 그렇다. 담임교사를 비하해 부르는 ‘담탱’이라는 표현은 실제 학생들은 수년 전 잠깐 사용했고 사어가 된 지 오래인 비속어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도 드라마 등에서 등장한 학생들은 담임교사를 ‘담탱’이라고 불렀다. 또, 연애 드라마나 웹툰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은 누가 들어도 ‘오글거리는’ 대사들을 주고받는다. 웹드라마 에이틴의 “너의 순간순간은 하나같이 예뻤다. 지치지도 않는지 쉬지 않고 예뻤다”와 같이, ‘청소년’의 ‘풋풋한’ 연애에서 주고받을 ‘법한’ 대사들을 비청소년들이 생각해 적어 내린다.

청소년에 대한 불성실한 고증은 대표적으로 과도한 낭만화와 일반화로 문제가 된다. 실제로 어떤 청소년들은 학교에 다니고 공부를 하는 게, 또는 그러지 못하는 게 고통스럽다. 친구를 만들지 못해 고민일 수도 있고,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으며 그 외의 어떤 문제로든 고통받을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 등 매체 속 청소년은 ‘노력’을 통해 문제들을 극복하고 활짝 웃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이 시간이라는 설명은 이미 비청소년이 되어버린 제작자가 청소년 캐릭터의 입을 빌려 하는 ‘꼰대 짓’일 뿐이다.

또한 이런 매체를 통해 청소년들은 캐릭터의 모습이 바람직한 그것인 것처럼 학습해, 그들처럼 극적이거나 인상적이지 않은 학창 시절을 보내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를 느끼기도 한다. 예를 들면 여성 청소년들이 많이 사용하는 커뮤니티인 네이트판에는 “‘에이틴’처럼 설레는 경험” 등에 대한 ‘썰’을 풀자는 게시물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댓글로는 “나는 그런 경험이 없다”며 자조하는 의견이 다수 달린다. 

사실 학교에 다니는 청소년의 대부분은 몰려다니며 패싸움을 해본 경험이나 드라마처럼 극적인 연애의 경험이 적을 것이다. 이렇다 할 사건 없이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거나 하지 않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하지 않는 학생들이 앞선 예시들보다는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매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가상에 가깝기 때문에 제작자의 마음대로 재단할 수 있는 캐릭터와 사건을 애용한다. 자신의 페이스로 학교에 다니고 별 탈 없이 졸업한 학생들은 ‘엑스트라’로만 묘사되는 미디어 속 자신을 보며, 자신의 학창 시절을 저평가하게 된다. 특히 학교폭력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삼으며 미화하는 매체의 경우 가해자의 주인공화로 인해 피해자에게 심각한 2차 가해가 이뤄짐을 부정할 수 없다.

다음으로 짚을 문제점은 미디어가 청소년을 지나치게 납작한 존재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매체 속 대부분의 청소년은 학생이다. 간간히 등장하는 학생이 아닌 청소년들은 가정에 심각한 불화나 경제적 어려움이 있거나, ‘일탈 청소년’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자신의 진로가 학교 밖에 있다는 걸 깨닫고 학교를 나오는 청소년이나 의무교육에 피로를 느껴 스스로 공부하고자 하는 청소년들은 비추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제작자인 비청소년들이 보기에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 또는 다루기 곤란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연애 드라마 속 청소년에게 주된 고민거리는 당연히 연애뿐이다. 액션 웹툰 속 청소년들은 몰려다니며 패싸움만 한다. 심지어 수준급으로 잘한다. 이런 모습이 ‘자기 이야기’라며 와 닿는다고 느낄 청소년이 얼마나 될까?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하이퍼 리얼리즘’이라고 평가받은 드라마 ‘스카이 캐슬’ 역시 대학 진학, 그중에서도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하며 그 열정을 지원받을 경제적 능력이 있는 학생들에게나 ‘하이퍼 리얼리즘’이지, 그렇지 못한 청소년들에겐 여전히 ‘그들이 사는 세상’일 뿐이다. 확실한 건 어떤 매체 속의 청소년들은 실재하는 청소년과는 거리가 있는 가상의 학생들이다.

현실에는 더 많은 청소년이 존재한다. 학교 안에도 밖에도, 가정 안에도 밖에도 청소년이 있다. 청소년은 비청소년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청소년 매체를 위하여

여성이 등장하는 매체가 모든 여성을 포괄할 수 없고, 군인이 등장하는 드라마가 모든 고증을 확실히 하지 못하듯 청소년 역시 매체를 통해 완벽하게 고증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다큐멘터리의 영역이지 드라마 등의 역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소년이 등장하는 매체의 주 소비자는 청소년이라는 점, 그러나 생산자는 비청소년이라는 점에서 비청소년이 비청소년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보다 더 철저하고 조심스럽게 제작돼야 한다. 만약 청소년들이 비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마음대로 상상해 허무맹랑한 드라마를 만들어 낸다면 비청소년들은 그들을 비웃고 멸시할 것이다. 비청소년들이 청소년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고 청소년을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어 청소년에게 판매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비청소년이 청소년보다 권력의 우위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비청소년 제작자들은 청소년 상이 어떤 식으로 왜곡되며 청소년 당사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청소년을 다루는 매체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청소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청소년에 대한 무지를 바탕으로 이미 만들어진 캐릭터성만을 답습해 계속해서 새로운 매체를 제작하는 건 청소년을 다루면서도 청소년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현실의 청소년에 대한 풍부한 관심과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면, 완벽히 현실을 고증해내지 않더라도 그 사려 깊은 시선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드라마화된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은 드라마 특유의 음산하고 기괴한 분위기 때문에 학생들이 현실의 모습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사용하는 단어, 민낯의 얼굴 등 사소한 부분에서 섬세한 고증이 제작자가 청소년의 해석에 소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창작물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말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창작물이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게 제작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청소년들, 더 많은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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