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W초대석] 김원길 (주)바이네르 대표
심수봉 '백만송이장미' 좋아하는 오뚜기
'나눠야 부자' 실천하는 기부천사
직원들 자립 돕고 고객을 왕으로
단골 쉼터 마련해 손수 요리하고 노래도

기부천사, 타고난 긍정맨, 에너자이저, 오뚜기, 저자이자 작사가· 가수(‘힘들어도 괜찮아’). 국내 1위 컴포트슈즈업체 바이네르() 김원길 바이네르() 대표의 별칭들이다.

김 대표의 경영철학이자 바이네르()의 사훈은 남다르다. ‘세상을 아름답게, 사람들을 행복하게, 그 속에서 우리도 행복하게!’. 그는 혼자 잘 살면 뭐 하느냐의 신봉자다. ‘나눌 줄 알아야 진짜 부자’ ‘고객이 있어 내가 있다라는 그를 지난 129일 서울 여의도 한강변에 있는 서울마리나 3층 바이네르 고객쉽터에서 만났다.

쇼룸을 겸한 쉼터엔 노래방기기, 러닝머신, 안마의자 등이 있었다. “단골고객을 위한 겁니다. 오랫동안 함께 한 고객을 명예지점장으로 위촉하는데 하루 3000만원 이상 매출을 올리는 분도 있습니다. 바이네르 제품의 특징을 잘 알고 설명하시니까요. 여기서 제가 직접 요리해서 대접합니다.” 한쪽 벽엔 그런 충성고객들 사진으로 가득했다.

김원길 바이네르 대표 ⓒ홍수형 기자
김원길 바이네르 대표 ⓒ홍수형 기자

 

코로나19로 월 매출 0, 지인· 고객 도움으로 16천 켤레 팔고 힘 얻어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는데도 그는 의지의 한국인답게 웃었다. “살면서 힘든 적이 많았지만 2020년은 정말 대책이 없었어요. ‘힘들어도 괜찮아라는 책을 내고 노래도 했는데 괜한 짓을 했구나 싶었지요. 직영점 30, 대리점이 40곳인데 지난해 2월 코로나19가 확산되자 하루 매출 0원인 곳이 속출했어요. 아침이면 이대로 영원히 잠들었으면 했어요.”

유동성 확보가 시급했다. “보험을 깨고, 골프선수인 아들(김우현) 뒷바라지를 위해 산 골프장 회원권과 부동산을 처분했어요. 5월엔 경기도 고양 본사 마당에 천막 20개를 치고 특판을 했어요. 지인과 고객들이 달려와 4일 간 17000켤레를 사 갔어요. 잘못 살진 않았구나 싶어 눈물이 났어요. 다시 시작해보자고 결심했지요.”

그렇게 장만한 비상자금으로 1년째 버티는 한편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여전히 적자지만 그는 세상 탓만 하고 있을 순 없다. 이것도 내 인생의 한 구간이다라고 말한다. 평소 불경기는 없다. 안 팔리는 게 아니라 팔리는 제품을 못 만든 것이라고 강조해온 만큼 편안하고 맵시 있는 신발로 세계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팔을 걷어 붙였다. 이탈리아 구두를 넘어서는 명품을 만들겠다는 각오다.

시련· 극복으로 점철된 드라마틱 인생, 성실· 미래 설계· 긍정· 배짱으로 승부

예쁜 건 만들기 쉽습니다. 편안하게 만드는 게 기술이지요.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니 디자인만 더하면 된다고 봅니다. 다행히 2018년 진출한 코스트코 매출이 늘어나고, 스니커즈와 미끄러지지 않는 운동화 반응도 좋습니다. 세계인이 찾는 명품을 만들어야지요. 장인이 아니라 명장이 되려 합니다.”

김 대표의 다짐이 말에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의 인생역정이 주는 믿음 때문이다. 그의 삶은 시련과 극복의 드라마다. 충청남도 당진에서 52녀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가난 때문에 중학교를 나오자 마자 구둣방에서 일했다. 손재주가 좋아 꿰매기부터 뒷손질까지 금세 익혔지만 더 배우려 혈혈단신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영등포 일대 구두방을 돌며 무작정 써달라고 매달린 결과 일곱 번째 가게에 채용됐다. 봉급 없이 숙식만 제공받는 조건이었는데 그나마 석달 만에 일감이 없어 내쫓겼다. 여름 한 철 강원도 설악동에서 일하고 돌아와 다시 제화점에 들어갔다. “출퇴근 시간 없이 일하고 맡은 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끝냈지요. 스무살에 견습공에서 기술자로 승진하고, 일하던 곳에서 납품하던 케리부룩에 입사했어요.”

1984년 전국기능경기대회에 나갔지만 기대했던 금메달 대신 동메달에 그쳤다. 실망과 절망에 휩싸여 갔던 부산 태종대에서 그는 마음을 바꿨다. “태종대의 절경을 만든 건 세월과 바람, 파도라는 생각이 들자 70일 훈련하고 신세 한탄을 하는 제가 부끄러웠어요. 끈기 있게 도전하면 언젠간 인생의 금메달을 따겠지 생각했어요.”

기술이 뛰어나 20대 중반에 대기업 부장만큼 벌었지만 그는 미래를 생각, 회사에 관리직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중졸이란 이유로 거절당하자 원래 받던 돈의 30%도 안되는 포장반으로 옮겨 품질관리를 하고 이어서 영업 관리도 맡았다. 모든 모델의 번호를 외우고 전국 매장 재고상태도 줄줄 뀄다. 지역별로 잘 나가는 모델도 파악했다.

꼼꼼한데다 배짱도 두둑했다. “인천백화점에서 매출이 적다며 나가라고 했다는 얘기를 듣고 특가세일을 실시해 월매출 1억원을 넘겼어요. 여세를 몰아 서울의 2대 백화점에서도 대박을 냈는데 내가 뒷돈을 챙겼다는 소문이 났어요. 억울하고 서운했지만 덕분에 독립을 하게 됐던 거지요.

김원길 바이네르 대표 ⓒ홍수형 기자
김원길 바이네르 대표 ⓒ홍수형 기자

 

회사 차렸지만 실패 연속, 편한 구두 트렌드 읽고 박람회 뒤져 바이네르 찾아

1991, 나이 서른에 회사를 차렸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구두부속품 회사를 접고 만든 ()원길 또한 납품하던 케리부룩 부도로 문을 닫았다. 94년 설립한 안토니오제화()4년동안 적자였다. 극단적인 선택 직전 마음을 고쳐 먹고 구두시장 트렌드를 살폈다. 편안한 구두가 뜨고 있었다. 품질과 판매는 자신 있었지만 무명 브랜드로는 시장을 뚫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 밀라노 구두박랍회에 참가해 3일동안 헤맨 끝에 코디바(CODIVA)’사의 바이네르를 찾았어요. 패션구두가 아닌 편안한 기능성 구두였죠. 1996년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2008년 유럽발 금융위기로 어려워졌을 때 아예 사들였지요.”

회사가 자리를 잡자 그는 직원이 행복한 회사 만들기와 나눔에 앞장섰다. 경기도 청평 등에 직원 연수원을 마련하고, 15년 이상 근무하면 대리점을 맡겼다. 매년 10억원씩 들여 서울· 부산· 광주· 당진· 경기도 일산 등에서 효도잔치를 열고,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우수장병을 선발해 호주 등으로 해외 연수도 보냈다.

김 대표는 자신의 장점이자 성공요인으로 눈치와 들이댐, 실천력을 든다. 눈치가 빠르다는 건 판단력과 소통능력, 공감력이 좋다는 것이고, 들이댐은 도전정신이자 기업가정신이라고 얘기한다.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죠. 아이디어의 힘은 5%에 불과합니다. 일단 답이 나오면 돌진합니다. 한번 머뭇거리면 몇 달이 지체되거든요. 뭐든 할 땐 과감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누군지 궁금해 할 테니까요.”

김원길 바이네르 대표 ⓒ홍수형 기자
김원길 바이네르 대표 ⓒ홍수형 기자

 

효도잔치· 장학금 등 연10억씩 기부, 영혼 담은 명품으로 세계 제패 꿈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눅 들지 않았다. 넘어질 때마다 실패를 디딤돌 삼아 더 높이 도약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혹독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도 그는 성공이란 경영과 나눔,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존경 받으며 행복을 쌓는 것이란 소신을 바꾸지 않는다.

신발이 불편하면 발은 물론 머리까지 아픕니다. 세계인이 찾는 편안하고 아름다운 명품을 만들 겁니다. 영혼을 담아야지요. 코로나19가 물러가면 지난해 못한 효도잔치도 다시 할 거구요. 안그러면 김원길이 망했다는 소리를 들을 테니까요. 있는 힘을 다해 살고, 나누고, 바이네르를 세계적인 명품회사로 키울 겁니다.”

자중회('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상수상자 모임) 회원인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죽어봤자 천국이 기다린다며 웃는 김원길 대표. 자신의 노래 힘들어도 괜찮아와 함께 심수봉의 백만송이 장미를 좋아한다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패기 가득한 소년이다.

김원길 대표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최고경영자과정(AMP) 수료(73). 안양대 명예 철학박사. 2012년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 표창, 철탑산업훈장. 2013년 아름다운 납세자상 2014년 일하기 좋은 으뜸기업 선정(중소기업진흥공단). 2018년 국립합창단 이사장. 2019년 서울대AMP대상 수상, 중소기업사랑나눔재단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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