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 이끌던 ‘86세대’ 떠나고
신임 대표로 ‘영페미’ 선출
일상 밀착형 운동 추구

(왼쪽부터)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신임 소장,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홍수형 기자
(왼쪽부터)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신임 소장,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홍수형 기자

 

한국 여성운동의 세대교체가 시작됐다. 그동안 여성단체를 이끌던 ‘86세대’(80년대 학번, 60년대생)는 ‘영페미’(1990년~2000년대 초반 대학 내 여성운동을 이끈 페미니스트)에게 자리를 내줬다.

대표 여성단체인 한국여성의전화와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최근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와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을 새 대표로 선출했다. 두 사람은 2000년대 전후 대학생활을 하고 여성학을 공부하며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40대 활동가들이다.

한국여성의전화는 1983년에 창립된 한국 최초의 가정폭력, 성폭력 전문상담기관이다. ‘남의 집안일’로 여겨지던 가정폭력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성폭력 정당방위 사건인 ‘안동주부사건’(1988년)을 처음 공론화했다.

송란희 신임 대표는 대학 총여학생회장 출신으로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뒤 2003년부터 여성의전화에서 활동가로 일했다. 송 대표는 “앞으로 여성들의 구체적인 일상을 함께 하고, 일상의 성차별을 해결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람과 함께 하는 단체로 만들어나가겠다”고 밝혔다. 

340여개 여성‧노동‧시민단체들과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160여명의 사람들이 참여한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15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출범식을 열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2018년 3월 15일 340여개 여성, 노동단체 등이 참여한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출범식 모습. ⓒ여성신문

여성운동, NGO에 대한 기대 수준 높아져

국내 첫 성폭력 전담 상담소인 한국성폭력상담소는 1991년 이화여대 여성학과 졸업생들이 뜻을 모아 문을 열었다. 성폭력 문제를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일어나는 성별 권력의 문제이자 여성의 성(sexuality)에 관한 폭력으로 재정립했다. 아동 성폭력 피해의 심각성을 알린 ‘김OO 사건’(1991년), 최초 성희롱 소송인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1993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2004년) 등을 공론화하며 성폭력 실태를 알리고 해결을 위한 운동을 벌였다.

김혜정 신임 소장은 2005년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을 시작해 2017년부터 부소장으로 활동해 왔다. 김 소장은 “여성운동이나 비영리단체 운영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아졌다”며 “높은 기대를 부담이나 무게가 아닌 힘으로 모아내 우리가 세운 원칙과 꿈을 실현해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2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6차 편파판결, 불법촬영 규탄시위’가 열려 참가자들이 불법촬영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018년 12월 2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6차 편파판결·불법촬영 규탄시위’ 모습. 익명의 여성들이 모인 '불편한 용기' 주최로 열린 6차례의 시위에는 연인원 30만명의 여성들이 모였다. ⓒ여성신문 

온라인 넘어 거리 집회도 Z세대 페미니스트 이슈 주도 

이들은 2000년대 초 대학에서 여성주의를 접하고 활동가로 여성단체에 들어와 여성운동의 성장 과정을 목격했다. 지난 40여년간 여성단체는 굵직한 여성 이슈에 앞장서 목소리를 내며 존재감은 커졌지만 그만큼 조직이 무거워졌다. 성폭력 특별법 제정, 호주제 폐지 등 진보·보수 없이 ‘여성계’가 이슈를 주도하며 굵직한 법제도 변화를 이끌어내던 시대를 넘어 평범한 여성들이 이슈를 공론화하고 국회를 움직이는 시대로 변화했다. 계급, 나이, 섹슈얼리티, 장애 여부 등의 사회적 범주들과 교차하며 여성들 간 차이가 발생하고 차별 양상도 다양해지고 중첩해서 발생하며 여성운동 의제도 다양해졌다. 

기존 여성단체가 40대 활동가 대표를 중심으로 세대교체되고 있는 동안, 온라인 여성운동은 이미 1990년대~2000년대생인 이른바 ‘Z세대’ 여성들이 주도하고 있다. 2015년 이후 메갈리아부터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을 거치며 페미니즘을 접한 여성들은 미투 운동과 혜화역 집회, n번방 사건을 직접 공론화하고 있다. 불법촬영 문제를 공론화한 혜화역 집회와 낙태죄 폐지를 주장한 비웨이브 주최 집회는 익명의 20대 여성들이 주도했고, 텔레그램 성착취 문제인 n번방 사건은 대학생 2명으로 구성된 ‘추적단 불꽃’이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신생 페미니즘 단체를 조직하고 페미니즘 정치를 표방하며 정치에 뛰어든 여성들 상당수도 90년대생들이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신지예 대표와 ‘스쿨미투’를 계기로 만들어진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양지혜 대표, 이가현 불꽃페미액션 활동가, 신지혜 기본소득당 대표 등이 대표적이다.

여성청년들의 이 같은 움직임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하는 여성단체가 없다는 지점과도 맞닿아 있다. 일각에서는 여성단체 활동가들이 정치에 입성하며 스스로 권력의 일부가 되면서 여성단체 활동에도 영향을 준다는 비판도 나왔다. 최근 한국여성단체연합 출신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김영순 상임대표가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피소 유출’ 의혹을 받으면서 더욱 불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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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대표들, 86세대와 Z세대 '다리' 역할 기대

전문가들은 기존 여성단체들이 여성청년들과 거리를 좁혀 일상의 차별을 바꿔나가는 운동을 벌이고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끝까지 해결할 수 있도록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40대 여성단체 대표들이 86세대 선배 그룹과 2030 여성들 사이에서 ‘허리’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86세대와 함께 활동하고 2030여성에 대한 이해도 있는 40대 단체 대표들이 그 간격을 메우고 연결하는 중간자이자 ‘다리’ 역할을 해낼 수 있다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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