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만화 『나, 여기 있어요』 펴낸 디담·브장 작가
만화계 내 성폭력 최초로 알린 피해 당사자
“피해자에겐 여러 선택지 있어...후회·수치스러워해도 괜찮아”

한국에서 ‘미투(#MeToo)’ 운동이 시작되기 4년 전인 2014년, 잠잠하던 만화계 내에서 최초로 성폭력 피해 공론화를 시도한 여성이 있었다. 웹툰 작가로 일하고 있는 디담, 브장 작가는 피해 사건 발생 이후 6년이 지난 2020년 12월 『나, 여기 있어요』라는 만화를 펴냈다. 공론화 이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재판 이후 피해자는 어떠한 시간을 보냈는지,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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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소’는 ‘승리’가 아니었다

재판에서 이겼다고 끝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선고가 내려져도 피해자의 삶은 바뀐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마음은 피해자가 홀로 감당해야 한다.

브장: 사람들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너무 쉽게 고소를 권해요. 제가 해보니 사법 절차가 피해자에게 친절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정말로 피해자라면 가해자가 유죄 판결을 받겠지’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런 시스템이 아니죠. 사실 유죄 판결이 나와도 아무 감정이 안 들었어요. 누군가 “어떻게 됐어?”라고 물으면 “응, 유죄 받았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저는 여전히 그 시간에 살고 있고 업계에 계속 있어야 하는데, 가해자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충분히 업계에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인 거예요. 그러니 제가 계속 활동할 이 업계에 가해자가 돌아오지 않을 수 있는지, 제가 계속 이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가장 두려웠어요.

디담: 삶은 계속 이어지잖아요. 사람의 인생에는 클라이맥스가 없는데, 유독 성폭력 사건의 경우에만 승소의 순간이 피해자의 삶에서 클라이맥스처럼 여겨지고, 그 뒤에는 모두가 관심을 끊잖아요. 그 부분을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모두가 관심을 두지 않는 ‘이후’에도 당사자의 이야기가 계속된다는 것.  

디담, 브장 작가가 『나, 여기 있어요』를 들고 있다.
디담, 브장 작가가 『나, 여기 있어요』를 들고 있다. ⓒ여성신문

쉬쉬해온 성폭력 이제 터놓고 말해야

브장 작가는 피해 당사자로서 성폭력에 대한 사회의 접근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성폭력 피해자에게는 함부로 연락하거나 말을 꺼내도 안 된다는 일종의 ‘공포’가 만연하다고 했다.

브장: 우리 사회가 성폭력을 너무 무서워해요. 성폭력이라는 의제를 꺼내면 안 된다는 생각, 섣불리 연락했다가 피해자가 불편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성폭력 피해자들을 더 숨게 한다고 봐요.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왜 이게 2차 피해지?”라는 질문이 피해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 논의할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무조건 ‘너 2차 가해자야’라고 낙인을 찍기보다는 말이죠. 

피해자를 돕는다는 사람들이 피해자에게 숨으라고 하는 경우가 있어요. 피해자를 계속 뒷전으로 밀어놓고 앞에 나서서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이게 건강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어요. 왜냐하면 ‘나만 믿어’ 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피해자를 대변한다고 생각하면서 정당성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너 진짜 피해자 맞는 거지?” “네가 진짜 피해자인지 내가 확인해야 해”라고 피해자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기도 해요. 그건 또 다른 가해거든요. 정말 마음 아픈 일이지만, 피해자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어요. 정말로 피해자를 돕는다면 피해자를 응원해주고 지지해주고, 피해자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함께 하는 거지, 피해자를 뒤에 숨겨놓고 피해자 앞에서 소리 지르고 윽박지르는 건 아니라는 거죠. 

디담: 저는 이 책을 남성들, 특히 업계 종사자들이 많이 읽으면 좋겠어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성폭력이 아니더라도 노동착취 등 위력에 의한 폭력의 피해자 중에는 분명 남성도 있어요. 사실 남성 카르텔이 공고해서 여성의 업계 진입이 어려운 만큼, 참고 견디면 언젠가 기회가 올 거라는 마음으로 버티는 남성도 있고, 못 버티고 떨어져 나가는 남성도 있고 다양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해자의) 말을 안 들으면 작가가 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업계 안에서 착취와 피해를 겪은 사람도 이렇게 살아남아서 책도 내고 계속 활동하고 있잖아요. 여성운동이나 반성폭력 운동의 연대가 커지려면 그런 문제를 깨닫고, 남성 카르텔에서 벗어나 연대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피해 고발 이후에도 만화 그리고
다른 생존자들 연대·지지 이어가

브장 작가는 웹툰계 반성폭력 활동을 해오고 있다. 문화예술, 콘텐츠 업계에서 발생하는 조직 내 성폭력 사건 해결을 위해 각종 자문을 하고, 피해자 상담과 지원도 병행한다. 

디담: 책 『김지은입니다』(봄알람,2020) 말미에 저자 김지은 씨가 성폭력상담소에서 상담사 과정을 밟고 활동하는 내용이 있어요. 사실 브장 작가도 미투 운동 이후 성희롱, 성폭력 예방 교육 전문 강사 활동도 하고, 피해자 지원 활동을 쭉 해왔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칫 모든 피해자가 피해 이후 활동가가 돼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인식을 주진 않을까 고민도 있었어요. 그래서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을 책에 넣은 거예요.

브장: 피해 당시 혼자 자취 중이었는데 가해자가 내 집을 알고 있으니 밤에 문이 바람에 살짝 덜컹, 하는 소리만 나도 울면서 깨곤 했어요. 아주 오래 그렇게 지냈고 자해도 했어요. 그런 내용을 책에 소개했을 때 이게 피해자의 어떤 전형성이 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어요. 반드시 다른 피해자를 도와야만 가치 있는 것인지 질문하게 됐어요. 또 작품을 만들면서 내가 피해를 겪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알려야 한다는 지점에 대해 매 순간 고민하게 됐어요. 사회적으로 피해자에게 ‘일을 제대로 못 했던 것 아니냐’라든가 행실이나 성격을 트집 잡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브장, 디담 작가는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어제도 새벽까지 그림 그리다 잠들었다”며 웃었다. 앞으로도 예술계 성폭력 관련 도움을 요청하는 곳에 조언과 자문을 제공할 예정이다. 

브장: 만화에서 사람들이 “그 사건 아세요?”하고 ‘현지’에게 묻는 장면 있잖아요. 실제로 대여섯 번은 들었어요. 어디 가서 굳이 “저는 그 사건 피해자입니다”라면서 말을 시작하진 않잖아요.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잊고, ‘피해자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건을 공론화하고 승소까지 했는데, 결국 업계에 없는 사람이 돼 버리는 거죠. 다른 피해자들도 ‘공론화하는 순간 업계에서 완전히 매장되지 않을까’ 공포를 느낀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잘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그분들께 용기가 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독자들 사이에서 다시 온라인상 피해 증언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기쁘고 뿌듯했답니다.

『나, 여기 있어요』의 마지막 페이지.
『나, 여기 있어요』의 마지막 페이지. ⓒ교양인

 

“피해자에겐 여러 선택지 있어...후회·수치스러워해도 괜찮아”

디담, 브장 작가가 『나, 여기 있어요』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피해자에겐 여러 선택지가 있다는 것, 후회나 수치스러운 감정을 느껴도 괜찮다는 것. 

디담: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에게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습니다”예요. 어떤 게 가장 마음이 편한지 생각해보시면 좋겠어요. 반드시 가해자를 고소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피해자를 돕는 기관들이 있으니, 혼자서 고민하기보다 최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에 가보시는 것도 좋겠어요. 누군가와 함께, 좀 더 편한 마음으로 해결 방안을 고민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성폭력 피해 신고상담지원, 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성폭력센터 '보라', 그리고 '해바라기센터' 등 기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엽서는 책 안에 끼워져 있다.
『나, 여기 있어요』 별책부록. 성폭력 피해자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성폭력 피해 신고상담지원, 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성폭력센터 '보라', 그리고 '해바라기센터' 등 기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엽서는 책 안에 끼워져 있다. ⓒ교양인

브장: 1차 피해마저도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2차 가해에 노출되는 등, 피해자는 모든 것을 굉장히 비관적으로 느낄 수 있어요. 피해자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해요. 업계에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고, 업계가 바꿔야 할 부분이죠. ‘그때 이러지 말걸’하는 후회하는 것조차 피해자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후회나 수치심 등 통상적인 ‘피해자’에 유사한 감정을 느끼면서 또 상처받는 분들도 생기는 거예요. 피해자는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저도 시간이 지나 거의 다 회복했고, 성폭력 강의를 하고 있지만 가끔 ‘거기 들어가지 않았으면’ 같은 후회를 하거든요. 그런 감정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스스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나, 여기 있어요』 별책부록. 성폭력 피해자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성폭력 피해 신고상담지원, 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성폭력센터 '보라', 그리고 '해바라기센터' 등 기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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