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시인 부부...남편은 책상에서
아내는 안락의자에서 작업
20세기 여성 작가와 21세기 여성 노동자의
가사노동, 얼마나 다를까

미국의 시인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을 기리기 위해 1880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웰즐리의 웰즐리 대학교에 만들어진 공간. ⓒWellesley College ⓒ게티이미지
미국의 시인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을 기리기 위해 1880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웰즐리의 웰즐리 대학교에 만들어진 공간. ⓒWellesley College

“브라우닝 부부, 두 시인은 3시에 점심을 먹을 때까지 ‘눈부시게 빛나는 오전 시간' 내내 글을 썼다. 로버트는 작은 거실에서, 엘리자베스는 응접실에서. 로버트는 책상에 앉아서 시구를 썼고, 엘리자베스는 안락의자에 앉아 발을 올려놓은 채 수년 동안 고심했던 장편 산문시 ‘오로라 리'를 썼다.”

요즘 읽고 있는 『예술하는 습관』이라는 책의 한 부분이다. 이 단락을 가져온 이유는 다름 아닌 “로버트는 책상에 앉아서 시구를 썼고, 엘리자베스는 안락의자에 앉아 시를 썼다”라는 문장 때문이다.

책상은 보통 한군데 고정되어 있다. 무엇인가 읽거나 쓰기에 안정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누군가 책상에 앉아 일에 집중하고 있으면 어지간하면 그 사람을 방해하기 쉽지 않다. 여러 사람이 오가는 거실에 놓인 책상일지라도,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독립적인 작업 공간을 보장받을 수 있다.

반면, 의자는 고정적이지 않고 가변적이다. 의자라는 가구 자체가 누구나 두루 필요에 따라 들고 날라 쓸 수 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책상 없이 의자에 앉아 글을 써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불편한지를 말이다. 안락의자에 앉아 발을 올려놓고 글을 쓰는 건 일견 편해 보이지만,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것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책상을 작업 공간으로 둔 자와 안락의자를 작업공간으로 둔 자. 여러 다른 변수를 통제하고 이 한 가지 요인만으로 분석해본다고 할 때, 두 사람 중에 누구의 생산성이 더 높게 나올까?

로버트의 책상은 작은 거실에 있었다. 이에 반해, 엘리자베스의 안락의자는 응접실에 있었다. 남편인 로버트는 방문을 닫고 외부의 소음이나 여러 가지 집안일로부터 분리되어 오로지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독립적인 방을 가졌다. 반면, 아내인 엘리자베스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외부 손님이 오면 응대를  해야하는, 시 쓰는 일 외에 일들로부터 자신을 차단할 수 없는 열린 공간에서 시를 써야 했다. 여러 다른 변수를 통제하고, 이 한 가지 요인만으로 분석해본다고 할 때, 두 사람 중에 누구의 생산성이 더 높게 나올까?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은 빅토리아 시대에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시인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남편과 동등한 작업실과 책상을 갖지 못했다. 적어도 이 책에 설명되었던 저 한 문장으로만 봤을 때는 말이다.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 ⓒWikipedia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 ⓒWikipedia

계속 책을 읽어내려갔다. “크래스너와 폴록은 돈을 빌려 롱아일랜드 동쪽 어촌 마을의 난방도 되지 않는 낡은 농장을 사들였다. 폴록은 그 농장의 헛간을 자신의 스튜디오로 개조했고, 크래스너는 위층의 작은 침실을 자신의 스튜디오로 삼았다.” 이 문장에서 또 한 번 마음이 부대꼈다.

두 사람은 모두 화가였다. 화가에게 작업실은 무척 중요한 공간이다. 시골 헛간은 상상하건대 작은 침실보다는 분명 큰 사이즈일 것이다. 남편은 큰 공간을, 아내는 작은 공간을 각자의 작업실로 나눠 가졌다.

리 크래스너는 미국의 2세대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독특한 화법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로 높이 평가받는다. 그런데도 그녀는 남편과 동등한 사이즈의 작업실을 갖지 못했다. 적어도 이 책에 설명되었던 저 한 문장으로만 봤을 때는 말이다.

엘리자벳 배릿 브라우닝은 1806년생으로 19세기 사람이다. 리 크래스너는 1908년생으로 20세기 사람이다. 이 두 사람과 21세기를 사는 지금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 많이 다른가 별 차이가 없는가.

가사 노동에서는 어떤가. “제 인생의 절반을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옷을 입히고,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수선하는 데 쏟아붓고 있어요. 모두가 잠들고 나면 타자기 앞으로 가서 다시 창작열을 불태우려고 노력하죠.”

고딕 호러의 선구자로 불리며 20세기 영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로 평가받는 셜리 잭슨(1916~1965)의 이야기다. 문학 평론가이자 잡지 편집자, 교수였던 남편은 모두가 잠들고 난 새벽에 타자기 앞에 앉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언제든 그가 앉고 싶을 때 책상에 앉으면 되었다. 『예술하는 습관』의 저자 메이슨 커리는 그의 남편에 대해 20세기 중반 미국인 아버지의 전형적인 양육방식대로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이라고 묘사했다.

셜리 잭슨은 1916년생으로 20세기 사람이다. 그녀와 21세기를 사는 지금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 많이 다른가 별 차이가 없는가.

2020년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가 늘었다. 파트너와 함께 집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이 늘었다. 한번 돌아보자. 서재나 책상은 남편이 쓰고, 아내는 식탁이나 거실에서 상을 피고 작업하는 게 너무 당연시되지는 않았는지. 일하다가도 아이 때문에 벌떡벌떡 일어나야 했던 사람은 아내이기만 했던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감히 이야기해보고 싶다. 독립적인 공간에 대한, 책상에 대한 욕망을 부려보자고. 배려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거실로, 부엌으로 나와 일하는 것을 너무 당연시하지 말자고. 아니면 함께 거실로 나오자고. ‘평등한 작업 공간, 평등한 가사 노동 분담', 19세기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이 못한 일, 20세기 리 크래스너가 못한 일,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한번 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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