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법] '괜찮다'는 말만으로 괜찮을 수 없는 순간들에 관하여
[모두의 법] '괜찮다'는 말만으로 괜찮을 수 없는 순간들에 관하여
  • 박찬성 변호사 ‧ 포항공대 상담센터 자문위원
  • 승인 2020.12.24 11:18
  • 수정 2020-12-24 12: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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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피해자 ‘괜찮다’라는 응답만으로는
성행위에 동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

 

준강간죄는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한 경우를 말한다. 이는 정신적·신체적 사정으로 성적인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 그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해 주기 위한 것이다. 대법원은 ‘심신상실’이란 정신기능의 장애로 정상적인 판단능력이 없는 상태를, 그리고 ‘항거불능의 상태’라고 하는 것은 심신상실 이외의 원인 때문에 심리적 또는 물리적으로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경우를 뜻한다고 판시한다.

필자가 다루어 왔던 준강간 사건의 많은 수는 피해자가 술에 취해서 완전히 의식을 잃고 있었던 경우, 즉 피해자가 그 간음행위 당시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안들이었는데 최근 대법원이 선고한 준강간죄 판결(2020도9667)은 이와는 조금 다른 사실관계가 전제된 경우로서 심신상실과 항거불능, 동의의 개념 등에 관해서 새롭게 생각해 볼만한 중요한 논점들을 담고 있다.

먼저 위 판례는 술에 취해 정신을 완전히 잃고 있던 상태가 아니라 술에 취해 있기는 했지만 상대방의 말에 피해자가 의식적으로 대답을 할 수 있었고 어떻게 대답을 했었는지를 스스로 기억도 하는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로써 대법원은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이 반드시 아무런 기억도 갖고 있지 못한 의식 없는 상태만을 한정적으로 지칭하는 것은 아님을 위 판례에서 분명히 한 셈이다.

이 사건 피해자는 심지어 피고인에게 ‘괜찮다’라는 답변을 했었다고 자인했는데, 대법원은 제반 증거에 따라 인정되는 성행위 전후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비춰 본다면 피해자의 ‘괜찮다’라는 응답만으로는 그 성행위에 대한 동의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언뜻 보면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 이미 누군가는 ‘괜찮다’라는 당사자의 말까지 있었는데도 괜찮지 않다는 걸 보면 결국 이 모든 건 남성을 어떻게든 가해자로 몰아가려는 술수가 아니냐 라고 흥분하고 있겠지만 - 수긍할 만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피해자는 나이 어린 미성년자로서 이미 만취한 상태였던 데다가, 문제된 성행위가 있기 바로 직전에 또 다른 가해자로부터 강간 피해를 입었고 그 피해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문제된 성행위 당시에는 심리적 또는 물리적으로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위 사건의 쟁점 중 하나는 피고인이 그 직전에 강간 피해가 발생했던 사실을 인지했었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법원은 여러 증거에 비추어 피고인이 이를 몰랐을 리가 없다고 보았다).

방금 전 강간을 당한 피해자가 온전한 정신으로 제대로 된 판단능력을 행사하고 진의에 따른 의사표시를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상식과 경험칙에 현저히 반하는 것이 아닐까. 위 판례에서 대법원은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의 상태에 해당할 수 있는 경우를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보다 전향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포섭 범위를 넓히는 방법을 통해 성행위에 대한 동의가 단순히 형식적인 의사표시만으로는 부족하며 진의에 따른 동의로 볼 수 있는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번 대법원 판결 이후에는 합리적 제3자의 시선에서 객관적으로 볼 때 피해자가 온전한 판단능력을 도저히 정상적으로 발휘할 수 없을 만큼의 중대한 충격적 경험을 했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경우라면, 그 직후에 미처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상황에서 가해자에게 동의를 하거나 양해를 한 것 같은 일부 언행을 한 사실은 없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언행을 한 사실을 피해자 스스로가 의식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준강간이나 준강제추행죄의 성립이 곧장 부인되어 버리는 일은 유의미하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다.

‘정신이 없는’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지금 당장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라고 갑작스레 요구를 하면서도 그 결정이 그 사람의 참된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에도 반한다. 하물며 정신적·신체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직후의 ‘괜찮다’라는 말이 정말로 괜찮다는 확정적 진의일까? 그러니, 위 판례는 대법원이 그간 강조해 왔던 성인지감수성에 입각해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라서 판단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로 논리전개와 사실인정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잘 보여준, 법리적 테두리 속에서 상식을 구현한 선례로 남을 것으로 본다.

박찬성 변호사‧포항공대 상담센터 자문위원
박찬성 변호사‧포항공대 상담센터 자문위원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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