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여성신문
  ⓒ뉴시스·여성신문

죽음을 생각한 적이 있다. 2008년 평화운동을 하다가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뒤, 새로운 청년 운동 모임을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열심히 뛰어다니던 때였다. 그럴듯한 이력이 없다는 이유로 청년들에게 글 쓸 지면 하나 쉽게 내어주지 않는 기성세대에 대항해, 우리의 이야기를 나눌 웹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함께할 친구들을 찾아 나서던 때였다.

어디에 소속되어 일하면 웹진을 만드는 일에 집중할 수가 없을 것 같아 낮에는 함께할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저녁에는 카페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다. 서빙 일은 대개 밤 12시 정도에 끝이 났다. 그때 잠시 살았던 집은 이대 앞 여성 전용 하숙집이었다. 화장실과 부엌을 공동으로 쓰는 곳이었는데, 학교 기숙사보다 고시원 같은 삭막함이 흐르는 공간이었다.

밤낮으로 열심히 뛰어다니던 어느 날 서빙을 마치고 방에 들어와 누웠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적막한 방, 고된 노동. 세상을 향해 우리의 이야기를 나눌 장을 만들자며 길을 나섰는데, 내 몸이 감내해야 할 게 생각보다 힘든 것에 놀랐던 것 같다. 그 놀람이 쉬 가시지 않고 그해 가을 계속 나를 괴롭혔다.

더듬이는 엄청 큰데, 몸집은 작은 개미가 된 것 같았다. 더듬이가 커 세상 모든 소리, 냄새, 움직임이 통증처럼 크게 느껴지는데, 그걸 소화하기에 몸뚱어리가 너무 작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더듬이만 커다란 그런 개미 말이다.

문제의식이 없던 예전의 나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앞으로 걸어가려니 용기기 안 생겼다. 사방이 다 막힌 느낌이었다. 그때 죽음을 떠올렸던 것 같다. 나의 상황을 동생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이들의 특별한 보살핌이 있었다.

다행히 그사이에 좋은 친구들을 만나 청년 웹진 「가름과 다름 사이_나름」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예민한 더듬이를 감당할만한 맷집도 좀 생겼다. 좋은 동료들과 작은 성공의 기쁨들을 채워가며 그 시간을 넘었다. 그 후로도 몇 년 동안은 가을이 오면 심장에서 쿡쿡 신호를 보내왔다. 물리적인 통증이었다. 마음의 아픔은 몸에도 흔적을 남긴다는 걸 그때 알았다.

ⓒ김경미 섀도우캐비넷 대표
ⓒ김경미 섀도우캐비닛 대표

아이러니했다. 해결하고 싶은 이슈가 있고, 그것을 풀어내고 싶은 열망으로 그 어느 때보다 가득 차 있었을 때, 죽음을 생각했던 것이 말이다. 만약 그 시간이 없었다면 자살을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나약한 존재들이 막다른 길에서 내리는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자살률, 지난해 20대 여성의 자살률이 전년 대비 25.5% 늘었다. 올 1∼8월 자살을 시도한 사람 중 20대 여성이 32.1%로 전 세대∙성별 통틀어 가장 많았다.

실업률,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9월 여성 고용 동향 자료에 따르면, 여성 실업률은 3.4%로 작년 9월보다 0.6% 늘었다. 그중 20대 여성의 실업률은 7.6%로 가장 높았다.

데이트 폭력에 노출되었을 확률,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9년 8월까지 데이트 폭력 가해자 중 20대가 전체 4만2620명 중 1만4638명 34.3%로 가장 많았다. 데이트 폭력 피해자는 4만4064명이었고, 이중 여성 피해자는 전체의 71.8%(3만1634명)를 차지했다. 보통 자신과 비슷한 연령대와 연애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볼 때, 가해자 중 20대 비율이 가장 높고, 피해자 중 여성 비율이 높으니, 데이트 폭력 피해자 중 다수가 20대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

자살률, 실업률, 데이트폭력 피해자일 가능성, 이 세 가지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그룹이 모두 20대 여성이라니. 젠더 미디어 <슬랩>이 20대 여성들의 자살에 대해 다루며 ‘조용한 학살이 시작되었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들의 죽음을 왜 자살이 아닌 학살로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책 구매율, 온라인 서점 YES24의 2016년과 2017년(1∼3월) 통계에 따르면 모두 20대 여성이 각각 23.8%, 24.5%를 기록하며 가장 높은 구매율을 보였다. 이들은 급성장하는 페미니즘 서적 시장의 탄탄한 구매층이기도 하다. 2018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2명 중 1명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생각하며, 88.8%는 미투운동 지지, 56.3%는 탈코르셋운동 지지, 60.6%는 혜화시위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높은 자살률, 가장 높은 실업률, 가장 많은 데이트 폭력 노출률 vs 가장 높은 책 구매율, 그리고 페미니스트로서의 높은 정체성. 20대 여성들이 지향하고 있는 세계와 그들이 발 딛고 있는 세계 간의 간극이 너무 크다.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나가자니 일상에서 경험하는 폭력이 너무 크게 느껴질 것이다. 폭력의 세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일 수 있는데, 세상을 읽어내는 그들의 더듬이가 몸집보다 더 커져 버린 것이다. 10여 년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사방이 높은 벽으로 막힌 느낌일 것이다.

그 벽들을 빨리 부셔야 한다. 함께 부셔줘야 한다. 그리고 손잡아 줘야 한다. 한 손으론 우리 20대 친구들의 손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으론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벽을 부수고, 발 딛고 있는 이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 조용한 학살을 멈추기 위해 달리 방법이 없다.

혼자만의 골방에서 혹시 울고 있을 친구가 있다면 이야기해주고 싶다. 연락하세요. 언니 찬스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에요. 언니도 아팠어요. 같이 용기 내 봐요. 차 한잔해요. 

 

*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