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지대] "그 분야에 여성인재가 별로 없어요"
[회색지대] "그 분야에 여성인재가 별로 없어요"
  • 김경미 섀도우캐비닛 대표
  • 승인 2020.12.12 12:07
  • 수정 2021-01-05 07: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년 전 서울대 경제학부가 생긴 지 72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 여성교수 후보 선정 사실이 포털에 실렸을 때였다. 기사는 첫 한국인 여성교수 탄생 예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나는 지금까지 한국인 여성교수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마저도 양성평등기본법에 따라 지원자 자체를 여성으로 제한해 선발한 거였다. “서울대 역사가 몇 년인데 이제 첫 여성교수라니 부끄러운 일 아닐까요?"라고 했더니, 친한 남성 동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분야에 여성 인재가 별로 없어요.”

순간 놀라서 “네? 아니에요. 제가 아는 여성 경제학 박사만 해도 몇 명이나 되는데요.”라며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고 대기업, 스타트업, 벤처투자사, 대학 등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친구들에 대해서 쭉 이야기했다. 그 동료가 평소에 남성 우월주의자에 차별적인 언행으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 문제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욕하고 넘어갔을 것 같다. 아니었다. 그는 성실하고 동료들과도 잘 지내며,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젠더 이슈에 대해서 배우려고 노력하던 좋은 남성 동료였다. 그래서 더 놀랐던 것 같다. “그 분야에 여성 인재가 별로 없어요."라는 그의 말이 우리 사회에 하나의 사실처럼 통용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한반도 정세 관련 토론회 기획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북핵 문제, 북미 관계가 주제였는데 주최 측에서 준비한 기획안을 보니 전부 남성 패널로만 구성이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니, 담당자는 별 주저함 없이 “그 분야에 여성 인재가 없어요.”라고 답을 했다. 그럴 리가 있냐며 다음 회의까지 좀 더 찾아보자고 제안을 하고 모임을 파했다. 그리고 며칠 뒤 관련해서 확인해보니 “찾아봤는데, 없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순간 고민했다. “아 그렇군요. 알겠어요.”라고 넘어갈지, 아니면 “제가 한번 찾아볼게요."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이다. 후자를 택했다. 다음 모임 때, 해당 주제 논문 검색, 언론 인터뷰, 칼럼, 관련 토론회 등을 두루 찾아보고 해당 전문가분들께도 자문을 구해 여성 인재풀을 정리해갔다. “남북관계 관련해서 이슈별 여성 인재목록 정리해봤어요. 너무 좋은 분이 많아 오히려 추리기가 어려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제11회 아시아미래포럼' 유튜브 영상 캡쳐본
'제11회 아시아미래포럼' 유튜브 영상 캡쳐본

이 사례들이 떠올랐던 이유는 얼마 전 한 언론사가 주최한 포럼에서 외국인 발표자가 해당 세션에 여성 발표자가 한 명도 없는 것에 대해 사과한 일 때문이다. 그 발표자는 “이번 패널 모든 분을 대표해서 사과를 드리고 싶어요. 패널 여성분이 한 분도 안 계십니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기본소득 논의도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소득은 주로 페미니스트적인 정책이기 때문입니다”라며 주최 측도 다른 한국 측 패널들도 하지 않은 사과를 대신 했다.

사실 TV 토론 프로그램, 정부 기관 및 각종 연구소 토론회 등의 발표자들이 100% 남성들로만 구성된 사례는 너무 흔해 화를 내기도 지칠 정도다. 왜 개선이 안 될까? 왜 이리 더딜까?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야기하는 공적 토론의 자리가 우리 사회 모습과 닮아 있어야 한다는, 이 자명한 사실이 현실에서는 왜 이리 실현되기 어려운 것일까.

게으름 때문이다. 또 그 게으름을 숨길 수 있는 너무 편한 알리바이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분야에 여성 인재가 별로 없어요"라는 말이다. 이 말 뒤에 숨어버리거나 안주해버림으로써 담론장의 논의 주체를 다양화하려는 노력을 우리 모두 덜 하는 것이다. 이제는 안된다. 해당 분야에 여성 인재가 없다는 말을 나 자신도 용인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쉽게 내뱉게 해서도 안 된다. 실제로 여성 인재가 절대적으로 적은 분야도 있을 수 있다. 그것 또한 우리의 고정관념이 낳은 결과는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문과계열은 여자가, 이과계열은 남자가 잘한다는 말이 여성들로 이과 계열을 선택하는 것을 두렵게 한 것은 아닌지 말이다.

100분토론 유튜브 화면 캡쳐 ⓒMBC
100분토론 유튜브 화면 캡쳐 ⓒMBC

내가 일하고 있는 섀도우캐비닛 프리시즌 강사 비율을 점검해보았다. 전체 강사진 13명 중 여성이 9명, 남성이 4명이었다. 해당 분야 전문성과 더불어 우리 사회 젠더 의식까지 고루 갖춘 분들을 찾고 보니 만들어진 비율이다. 이 비율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다만, 섀도우캐비닛 프로그램의 구성이 우리 사회 실제 모습과 닮기를 바란다. 또한 “해당 분야에 여성 인재가 없어요"라는 말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참고자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직도 못 푼 리스트가 많다. 마음이 바쁘다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여성신문은 1988년 창간 이후 여성 인권 신장과 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국내 최초, 세계 유일의 여성 이슈 주간 정론지 입니다.
여성신문은 여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여성의 '안전, 사회적 지위, 현명한 소비, 건강한 가족'의 영역에서 희망 콘텐츠를 발굴,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를 해주세요.
여러분의 후원은 여성신문이 앞으로도 이 땅의 여성을 위해 활동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여성신문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