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인터뷰] 한국 여성 록 컴필레이션 ‘We, Do It Together’
기획·추진한 에고펑션에러 김민정·빌리카터 김지원
조력자로 참여한 김민규 일렉트릭뮤즈 대표
인디 음악계 내 성폭력 고발 등
페미니즘 운동에 힘 얻어 '여성연대' 기획
“홍대엔 ‘탈덕’ 유발자만 있는 게 아니라
좋은 음악 만들며 소수자 위해 목소리 내는 이도 많아”

김민규 일렉트릭뮤즈 대표, 김민정 에고펑션에러 보컬, 김지원 빌리카터 보컬 ⓒ홍수형 기자
여성 록 컴필레이션 앨범 ‘We, Do It Together’가 세상에 나왔다. 기획과 실무를 맡은 이들 중 (왼쪽부터) 김민규 일렉트릭뮤즈 대표, 에고펑션에러 멤버 김민정 씨, 빌리카터 멤버 김지원 씨를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홍수형 기자

‘뮤즈’이기를 거부하는 여성 록 음악가들이 모였다. 1998년 데뷔한 한국 인디 신의 상징 황보령, ‘삐삐밴드 이윤정 이후 가장 색깔 있는 프론트우먼’ 이지향의 사이키델릭 듀오 향니, 한국 여성 보컬 김세희가 활동하는 다국적 포스트록 밴드 티어파크, 드라마틱한 노래와 다채로운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국내외에서 주목받은 카코포니, 김사월이 프로듀싱을 맡은 정규앨범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노래한 싱어송라이터 천미지, 여성 멤버들의 에너지로 무대를 휘어잡는 사이키델릭 펑크록 밴드 에고펑션에러, 몽환적인 사이키델릭 록으로 호평을 얻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애리, 소리꾼 이자람이 이끄는 아마도이자람밴드, 에너지 넘치는 라이브로 유명한 이모 팝 밴드 아디오스 오디오, 블루스·컨트리·펑크 등 장르를 넘나드는 카리스마 여성 록 듀오 빌리카터, 대구 출신 스케이트 펑크 트리오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 반짝이는 기타 리프가 매력적인 곡들을 발표하며 주목받은 4인조 밴드 다브다까지, 쟁쟁한 인디 음악가 12팀이 ‘여성’, ‘분노’를 키워드로 노래를 만들었다.

여성 록 컴필레이션 앨범 ‘We, Do It Together’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팬들과 관계자들, 동료 음악가들의 기대와 지지 속에서 지난 16일 크라우드 펀딩 목표치의 210% 이상을 달성했다. 오는 28일 온라인 공연 ‘WeWeWe Festa 2020’도 준비 중이다.  판을 바꾸는 ‘조력자’가 되고픈 남성들이 들어봐야 할 음반이며, 인디 음악계 내 성차별·성폭력에 지친 팬들에게 전하는 연대와 위로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여성 록 컴필레이션 앨범 ‘We, Do It Together’에 참여한 12팀 ⓒWeWeWe 기획단
여성 록 컴필레이션 앨범 ‘We, Do It Together’에 참여한 12팀 ⓒWeWeWe 기획단

 

인디 음악계 내 성폭력 고발 운동 등

페미니즘 목소리에 힘 얻은 여성 음악가들

업계 내 '여성연대' 기획...2018년부터 네트워킹 이어와

시작은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고발 운동이 시작되던 때였다. 존경받고 촉망받던 인디 음악가들의 성폭력과 여성혐오도 하나하나 드러났다. 실망한 팬들이 하나둘 ‘인디 탈덕’, ‘홍대 탈덕’을 선언했다.

그해 여름, 일본의 여성 록 컴필레이션 음반을 듣던 민정 씨는 생각했다. “우리나라엔 왜 이런 게 없을까? 페미니즘이 사회적 이슈인데 여성 록 뮤지션들이 사운드로 시원하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주위에 도움을 청했다. “민정이가 제게 ‘여성 음악가들이 힘을 합쳐 씬 안에서 여성주의를 이야기할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냐, 그런데 힘을 모을 사람들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먼저 그렇게 말해줘서 반가웠고 저도 함께하기로 했죠.”(지원 씨)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판을 벌였다. 민정 씨는 음악가들을 찾아가 인디 음악계 내 여성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내자고, 가려진 여성들을 조명하고 연대하자고 설득했다. 흔쾌히 참여하겠다는 이들은 13~14팀 중 5팀뿐이었다. 숱한 시행착오와 실패, 코로나19 악재까지 겹쳐 주저앉을 뻔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여성가족부와 마포문화재단 등의 지원사업에 선정됐다. 공연과 네트워킹을 이어가자 점점 사람들이 모였다. ‘WeWeWe 기획단’이라는 이름으로 여성·퀴어 음악가를 위한 공연 시리즈 ‘Circles’(2018), ‘WeWeWe Networking Party’(2019)를 열었다. 그리고 이달, 여성 록 컴필레이션 ‘We, Do It Together’를 선보였다. 민정 씨와 지원 씨의 말을 빌리면 “원기옥을 모으듯 모두의 힘을 합쳐” 만들어낸 결실이다.

여성 록 컴필레이션 ‘We, Do It Together’ ⓒWeWeWe 기획단
여성 록 컴필레이션 ‘We, Do It Together’ ⓒWeWeWe 기획단

 

여성 록 컴필레이션 ‘We, Do It Together’

‘여성’ ‘분노’ 담은 다채로운 12곡 선보여

동료 여성 향한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도

앨범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여성’과 ‘분노’다. 에고펑션에러의 ‘판’은 성범죄 가해자에 자꾸만 면죄부를 주는 사법부에 대한 직설적 비판이 담긴 가사와 펑키한 리듬이 귀에 쏙 들어오는 곡이다. 보컬 민정 씨가 부르는 첫 소절이 날카롭고 시원하다.

술에 취했다는 변명 같지 않은 변명
창창하다 면죄? 가장이라 면죄?
두 눈과 귀를 가리고 심판의 날을 휘두르는
먹통의 부끄러움이 왜 우리의 몫인가

빌리카터의 ‘Hell’은 이 세상이 21세기 버전의 지옥이라는 내용의 하드코어 펑크곡이다. 지난해 홍콩민주화운동에 동참했던 10대 여성이 경찰에 체포된 후 집단 성폭력을 당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만든 곡이다.

15 years girl raped and killed (15세 소녀가 성폭력 후 살해당했어)
Full of blood on the concrete field (콘크리트 바닥엔 피가 흥건하고)
Eyes are shut mouths are sealed (두 눈은 감기고 입은 막히고)
Cold bodies cannot be healed (차가운 몸은 회복될 수 없어)
It’s 21st century version of hell (이게 21세기 버전의 지옥)

여성으로 살기 힘든 세상에서 꿋꿋이 활동하는 동료 여성 록 음악가들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노래도 있다. “다 죽이고 죽고 싶지만 사실 너와 함께 살고 싶고 웃고 싶다”고 고백하고(애리의 ‘나는 깜빡’), “잘했다고, 수고 많았다고, 괜찮다고, 다 지나간다고, 잘 버텼다고 위로를 건네기도(아마도이자람밴드의 ‘Good Night’) 한다.

김민규 일렉트릭뮤즈 대표, 김민정 에고펑션에러 보컬, 김지원 빌리카터 보컬 ⓒ홍수형 기자
(왼쪽부터) 김민규 일렉트릭뮤즈 대표, 에고펑션에러 멤버 김민정 씨, 빌리카터 멤버 김지원 씨가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스튜디오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다양한 개성·서사 지닌 여성 음악가들과

‘판을 바꾸는 조력자’ 되고픈 남성들의

‘페미니즘 말하기’ 계속되길

“홍대엔 ‘탈덕’ 유발자만 있는 게 아니라

좋은 음악 만들며 소수자 위해 목소리 내는 이들도 많아”

한국 ‘여성’ 인디 음악가들의 자전적 스토리텔링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코로나19로 음악계가 위축된 올해도 성진영·슬릭·신승은·이랑·이호 등 여성 싱어송라이터 5인의 ‘이야기, 멀고도 가까운’ 프로젝트 음원이 지난 4월 발매됐다.

물론 각기 다른 개성과 서사를 지닌 음악가들을 ‘여성’이란 키워드로 불러모으기란 쉽지 않았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여성들이 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지만, 여성 음악가가 여성의 정체성, 여성주의적 면모를 드러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팽배했던 게 불과 몇 년 전”(지원)이다. “기획 초기엔 ‘여성’ 프레임을 벗어 던지고 싶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그래도 “페미니즘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이 씬의 더 큰 불행이고 모험”(민정)이라는 데 다수가 공감했다.

음악가이자 작가인 오지은 씨는 2018년 여성신문 칼럼에서 우리나라 여성 뮤지션들이 어떻게 “‘여신’ 또는 ‘마녀’”로만 소비됐는지 지적한 바 있다. (▶[기울어진 극장] ‘홍대 여신’은 혐오다 www.womennews.co.kr/news/128852) 여성 음악가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변치 않았다. “여성 음악가들의 자전적 스토리텔링을 담은 음악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지만, 한국 인디 씬에서 록 여성 아티스트는 창작의 힘에 비해 조명받지 못하고 있고, 여성혐오는 여전히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몇 년 전 ‘여성의 밤’ 공연, 수익을 미혼모 여성 등에 기부하는 공연을 했어요. 그런 공연이었는데도 무대에서 ‘여러분, 성차별주의자가 되지 않으려면 성평등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같은 말을 하면 분위기가 싸늘해졌죠. 창작자로서 같은 결과물을 내도 여성이라 다른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유명한 남성 음악가들이 남성 후배들을 발굴하고, 공연 오프닝에도 데리고 다니면서 끌어주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 이게 정말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의문이었죠. 내가 남성 프론트맨이었으면, 우리 밴드가 ‘남성 음악’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요.” (지원)

이번 프로젝트에선 남성들의 참여도 눈에 띈다. 여성 외 다양한 젠더로 구성된 밴드도, 남성 기획·실무자도 함께했다. “소외된 목소리를 듣고 공감하고 같이 얘기하는 일이 어느 성별에 한정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민정) “제 주변에도 여성주의 관점으로 자신을 반성하고, 주변 남성에 다시 전파하는 ‘남페미’들이 있어요. 폭력 생존자 모임엔 항상 조력자들이 있잖아요. 페미니즘은 여성만 잘살겠다는 운동이 아니라 모두의 평등을 위한 운동이고요.” (지원)

인터뷰를 경청하던 김민규 대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기획의 주체는 여성이고, 성과도 고스란히 여성의 몫으로 돌아가야죠. 저는 조력자이자 ‘이 동네 고인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에요. 인디 씬에서 일하는 동안 여성 아티스트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너무 많이 봤어요. 그게 성차별이고 유리천장인데, 이 바닥에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요. 남자도 똑같이 힘든데 성차별이 어딨냐고, ‘음악적 상상력을 페미니즘으로 억압하면 안 돼’라고.... 전 세계적으로 지금 가장 주목받는 음악을 보면 여성의 비중이 커요. 이 씬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성들이 충분한 성과를 낼 수 있게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음반은 인디 음악계 내 성차별·성폭력에 지친 팬들에게 전하는 연대와 위로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홍대엔 ‘탈덕’ 유발자들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안전하게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진정성을 갖고 훌륭한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고 알리고 싶었어요. 우리의 말하기가 다른 여성들에게 가 닿아서 ‘더 또렷하고 용감한 목소리를 내도 괜찮다’는 격려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소수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많은 음악가들과 뭔가 또 해보고 싶어요.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힘을 내어 버티다가도, 서로 손을 잡아주고, 그 힘으로 또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주자고요. 엄청난 재능을 가진 인디 음악가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각자의 재능을 발휘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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