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 협박해 성관계 강요하고 ‘그만’ 요구 무시한 20대 남성
1·2심 무죄 판결 뒤집은 대법원 “성적 학대 인정”

“청소년 성적 자기결정 능력, 신중히 판단해야” 판결에선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 인식 엿보여
“자기결정권, 능력 문제 아닌 온전한 인격체로 살기 위한 본질” 지적도

법원 이미지. ⓒ뉴시스·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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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자를 협박해 성관계를 요구하고, 관계 중 피해자가 ‘그만하자’고 했는데도 계속한 20대 남성. 잇따른 무죄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성적 학대’를 인정한 유죄 판결이 나왔다.

다만 대법원은 ‘미성년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가치관과 판단능력을 갖췄는지를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청소년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미성숙한 존재’라는 인식이 엿보인다. 이에 “성적 자기결정권은 개인의 나이나 성숙도에 따라서 다르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 모든 여성이 온전한 인격체로 존재하기 위한 본질적인 요소”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번 판결이 성폭력 판단 기준을 ‘폭행과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바꾸자는 ‘비동의강간죄’ 개정에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15세 협박해 성관계 강요하고 ‘그만’ 요구 무시한 20대 남성
1·2심은 “성폭력 증명 어려워” 무죄

대법원 “성적 학대 인정”

사건은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해자 이 씨는 그해 10월, 15세였던 피해자에게 아르바이트 명목으로 접근해 신체 노출 사진을 요구하고 이를 빌미로 피해자를 협박하며 성관계를 요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성관계 도중 피해자가 이 씨에게 “그만하자”고 했는데도 계속해 성적으로 학대한 혐의(아동복지법 위반)도 받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씨는 또 다른 15세 피해자에게 SNS로 접근해 신체 노출 사진을 받아내고, 피해자의 이름과 사진을 온라인에 공개하겠다고 협박해 성관계를 요구하는 등 위력에 의한 간음 미수 및 강간미수 혐의도 받고 있다.

군검찰은 A씨를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상 강간 혐의로 기소했다가, 1심 재판과정에서 공소장을 변경해 아동복지법상 아동에 대한 음란행위강요·매개·성희롱 등의 혐의와 청소년성보호법상 성매수 혐의로 기소했다.

1심 보통군사법원은 이 씨의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와 강간 미수 혐의는 무죄, 청소년보호법상 성매수 혐의와 위력 간음 미수 혐의는 유죄로 판단해 징역 4년을 선고했다. 2심 고등군사법원은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는 무죄, 위력 간음 미수 혐의도 무죄 판결했다. 협박 혐의만 유죄로 판단해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만 15세 피해자의 경우 미숙하나마 자발적인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연령대로 보이고, 군검사도 이씨가 피해자와 성관계를 가진 자체에 대해서는 학대행위로 기소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 “이 씨가 사진을 빌미로 피해자를 협박할 당시 피해자를 간음할 막연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으나, 간음행위를 위해 피해자를 만나기로 계획한 때까지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다”며 “협박을 간음행위에 사용하려는 고의를 가지고 있었다거나 협박이 간음행위 수단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점이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아동복지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군인 이모(23) 씨의 상고심에서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고등군사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지난 22일 밝혔다. 대법원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해 간음행위에 사용하려는 고의가 있었고, 협박이 간음행위의 수단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봤다. “피해자가 이 씨의 협박에 못 이겨 이 씨에게 접촉하기에 이른 이상, 피해자가 성관계를 결심하기만 하면 이 씨가 간음행위를 실행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 개정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해 1월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 개정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발족 기자회견.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청소년 성적 자기결정 능력, 신중히 판단해야” 판결에선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 인식 엿보여
“자기결정권, 능력 문제 아닌 온전한 인격체로 살기 위한 본질” 지적도

그러나 대법원은 “피해자의 연령대 등을 이유로 피해자가 성적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은 잘못”이라고 봤다. “아동·청소년은 사회적·문화적 제약 등으로 아직 온전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인지적·심리적·관계적 자원의 부족으로 타인의 성적 침해 또는 착취행위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다며, “원심은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성적 가치관과 판단능력을 갖췄는지 여부 등을 신중하게 판단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곧바로 비판이 나왔다. 장태수 정의당 대변인은 22일 브리핑에서 “무죄를 선고했던 2심 재판부의 법리오해를 바로잡은 것은 다행”이나, “대법원이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성적 가치관과 판단 능력을 갖췄는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밝힌 대목은 아쉽다. 청소년들을 미숙한 존재인 양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소년도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이고, 성적 자기결정권은 그 인격체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다. 따라서 성관계 도중 그만하라는 의사를 분명히 밝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했음에도 그 인격체의 권리를 짓밟은 가해자의 행위 자체를 범죄로 단죄하면 될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상대방의 동의여부를 중심으로하는 성범죄 처벌 강화를 위한 형법개정안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nbsp;<br>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지난 8월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상대방의 동의여부를 중심으로하는 성범죄 처벌 강화를 위한 형법개정안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이번 판결을 계기로 성폭력 판단 기준을 ‘폭행과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바꾸는 ‘비동의 강간죄’ 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간 여성계의 숙원이자 미투 운동이 남긴 과제로, 지난 20대 국회에서만 비동의강간죄 개정 관련 법안 10건이 발의됐으나 회기 만료로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서도 강간죄 구성요건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로 개정하는 안(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14인), 강간죄 구성요건을 ‘동의 없이’로 개정하는 안(류호정 정의당 의원 등 13인)이 발의돼 상임위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정의당은 “이번 판결과 설명으로 비동의 강간죄 도입이 필요한 사법적, 사회적 이유를 확인했다”며 비동의 강간죄 개정을 거듭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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