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폭력상담소 주최 온라인 전시
‘시간을 거스르다’ 11일 개막
친족성폭력 생존자·연대자·예술인 64명
공소시효 폐지 위해 목소리 높여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온라인 전시 ‘시간을 거스르다’에선 생존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온라인 전시 ‘시간을 거스르다’에선 생존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가상의 3D 공간을 채운 문장들을 읽는다. 키보드 방향키를 좌우로 누르자 허공에 매달린 글자들이 커지면서 반짝반짝 빛난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사과하지 않는 범죄자들”
“기억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범죄가 남기는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데 공소시효는 왜 범죄를 사라지게 하는가”
“내가 끝났다고 선언할 때까지 끝내지 않도록”
“가해자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 언제라도 늦지 않습니다”
“살아남아 폭력을 폭력이라 말하는 우리에게 사법정의를”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온라인 전시 ‘시간을 거스르다’(https://vrplay.kr/)가 지난 11일 개막했다. 다이브 (사진, 영화) 도영(디자인), 소람(다큐멘터리), 아오리(영화, VR), 존벅(디자인,다큐멘터리) 등 예술가 5명이 약 6개월간의 준비 끝에 선보이는 전시다. 예술인만이 아니라 친족성폭력 생존자, 지지자 등 다양한 이들이 참여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주최하고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후원한다. 

친족성폭력은 소수에게만 일어나는 극단적인 사건, 회복이 불가능한 끔찍한 일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누군가는 생존자에게 왜 그렇게 오랫동안 반복해서 피해를 겪었는지, 왜 더 일찍 신고하지 않았는지 묻는다. 가족이라 법적 처벌은 어렵다고, 가족이니 용서하고 넘어가면 안 되느냐고도 한다.

이러한 통념을 깨기 위해 전시 기획단은 생존자들을 만났다. 9명의 생존자들이 그간 어떤 마음의 갈등을 겪었는지, 각자의 싸움과 회복은 어땠는지를 말한다. 온라인 전시장에서 틸트브러시로 그린 그림, 음성 메시지, 인터뷰 영상을 보노라면 생존자들이 스크린 바로 너머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온라인 전시 ‘시간을 거스르다’에선 생존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시간을 거스르다’ 전시 인터뷰 영상 캡처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온라인 전시 ‘시간을 거스르다’에선 생존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시간을 거스르다’ 전시 인터뷰 영상 캡처

“세상의 모든 생존자들에게, 당신들은 이제 좋아질 길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 절 드러낼 생각은 없지만 지금은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더는 그것이 제 삶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습니다. (...) 우리가 계속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더 많은 생존자들이 함께할 것이고 힘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익명의 생존자)

“어린 나를 구해달라고, 살게 해 달라고, 세상에 내 얘기를 해 달라고 말했는데 결국 내가 하게 됐습니다. 만약 공소시효가 없었다면, 법률이 피해자의 삶을 보호하고 생각할 줄 알았다면, 오늘날까지 너무 힘든 나는 없었겠지요. (...) 생존자들이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이라도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소시효 폐지가 가장 선행돼야 합니다.” (생존자 ‘명아’)

공소시효는 생존자들을 두 번 괴롭힌다. 2007년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전면 상향 조정되면서 친족성폭력 공소시효는 7년에서 10년으로 늘었다. 그러나 가족의 특성상 가해자/피해자의 분리가 어려운 현실, 생존자가 가해자에게 갖는 이중적인 양가감정 등은 피해 사실을 드러내기 어렵게 만든다. 친족성폭력 피해자의 55.2%는 첫 상담을 받기까지 10년 넘게 걸렸다(한국성폭력상담소 2019 상담통계)는 통계가 있다. 현행법에서는 13세 미만의 사람 및 신체·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 성범죄 피해를 겪을 경우, 특례를 적용해 공소시효를 연장하거나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친족관계일 경우 특례가 적용되지 않는다. 한 생존자는 이번 전시 인터뷰에서 “(친족성폭력 공소시효가 폐지되면) 내 발목을 붙잡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진다는 느낌이 들 것 같다. 내가 뭘 해도 할 수 있어 삶이 달라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선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와 생존자들을 지지하는 연대자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시간을 거스르다’ 전시 인터뷰 영상 캡처
이번 전시에선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와 생존자들을 지지하는 연대자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시간을 거스르다’ 전시 인터뷰 영상 캡처

이번 전시에선 연대자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가 왜 중요한지 이야기하고 생존자들을 지지한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인터뷰 영상에서 “(친족성폭력의 특징은)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 또렷하게 피해자의 일상을 지배하면서 고통을 준다는 것”이라며 “친족성폭력 공소시효는 피해자의 경험과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한 채 일률적으로 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부장제와 가족 내 성폭력은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주는 시각예술 작업도 인상적이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여성 인권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도록 주요 사건들을 순서대로 알기 쉽게 정리했다.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나 성적 쾌락을 위한 대상으로 취급받은 역사의 연표다.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언론에 보도된 주요 친족성폭력 사건도 날짜순으로 정리했다.

전시 기획단 측은 “가상전시장 이용이 낯설고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이 이 땅에 아주 많이 존재하며, 이번 전시 작품은 그분들을 위해 제작됐음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더 이상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응원해주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전시를 볼 생존자들께도 지지와 응원을 전했다. “생존자들과 함께 행성을 만들면서 더 많은 행성이 생겨 전국을 돌며 전시하자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계속 이야기하고 움직인다면 분명 세상이 바뀔 것이라 믿는다. 우리 함께 힘내고, 우리는 꼭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더 자세한 전시 정보는 http://www.sisters.or.kr/load.asp?subPage=110&board_md=view&idx=5697 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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