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성폭행, 오빠의 추행... 살아남은 여자들이 세상에 말한다
아빠의 성폭행, 오빠의 추행... 살아남은 여자들이 세상에 말한다
  • 이세아 기자
  • 승인 2020.11.08 15:34
  • 수정 2020-11-09 16: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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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성폭력 생존자 12인이 그리고 쓴 책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 출간 앞둬
생존자들이 원고·편집·펀딩·홍보까지 직접 나선 건 처음
“낙인·편견 없이 친족성폭력 말할 수 있는 세상 만들고파”
6일 오후 서울 서대문 여성신문에서 친족 성폭력 경험을 가진 생존자들이 인터뷰 이후 함께 연대하는 의미로 손을 잡고 있다. ⓒ홍수형 기자
친족성폭력 생존자 수기집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가 곧 세상에 나온다. 출간을 맞아 여성신문과 인터뷰한 생존자들이 지난 6일 서울 서대문구길을 걷다가 손을 잡고 나란히 섰다. ⓒ홍수형 기자

아빠의 강간, 오빠의 추행... 가족으로부터 성폭력을 겪은 여자들이 모였다. 맛있는 걸 먹으며, 깔깔깔 키득키득 웃으며 폭력과 학대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바위 같던 이야기가 어느새 속에서 굴러 나와 입을 열자 툭 떨어졌다.

“내가요, 어렸을 때 남자 형제에게…”
“다 그런 거 아니에요?”

다른 생존자의 말에 ‘정인’은 안도했다. “그래 내가 잘못한 게 아니구나. 나만 심각한 문제를 안고 사는 것 같았는데, 여기선 내가 특별하지 않았어요.” ‘푸른나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했어요. 이렇게 슬프고 이상하고 무서운 얘기를 신나게 웃으면서 할 수 있나? 근데 이게 위로가 되네.” ‘민지’와 ‘명아’도 맞장구쳤다. “처음으로 안전한 공간에서 말할 수 있었어요.” “감추면서 살아온 나의 정체성을 솔직히 드러낼 수 있었어요.”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성폭력 생존자 자조모임 ‘작은말하기’에 참석했던 네 여자는 이제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낸다.

“우리 언젠가 광장에 나가서 이야기하자. 우선 책을 쓸까?”

‘푸른나비’의 제안으로 시작된 친족성폭력 생존자 수기집 출판 프로젝트는 성공을 향해 가고 있다. 생존자 12인의 글·그림을 담은 책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는 크라우드 펀딩 하루 만에 목표액 100%를 달성했다. 11월 7일 기준 540%(약 1100만원 모금)를 넘겼다.

친족성폭력 생존자 수기집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
친족성폭력 생존자 수기집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

 

여기 살아 있는 우리, 당신의 희망이 되길

친족성폭력 생존자의 삶에 관한 기록은 그간 꾸준히 세상에 나왔지만, 생존자들이 글·그림 작업부터 편집·디자인, 펀딩, 홍보까지 직접 나선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펀딩 페이지에는 힘찬 선언을 실었다.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인식’을 주고 싶습니다.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지만 우리들은 여기 살아 있습니다!”

생존자들이 과거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40대인 정인은 지난해에야 상담소의 문을 두드렸다.

“성폭력 전문상담원 교육에서 ‘(친족성폭력 피해는) 치유된다’는 말을 처음 듣고 배신감을 느꼈어요. 내가 해온 건 뭐야? 긴 시간 혼자 끙끙 앓았거든요. 좀 더 빨리 문제를 깨닫고 상담을 받았으면, 그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데 쏟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이번 원고를 쓰면서 조금은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정인은 가정폭력·성폭력 전문상담원 교육을 수료했고, 다른 생존자들과 만나 연대하며 공부와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명아는 성폭력을 겪은 지 30년 만에 여성단체에 도움을 청했다. 35세에 쉼터(열림터)에 입소했다.

“다른 입소자는 다 10대였어요. 다들 밝았어요. 자기들끼리 싸우고, 활동가 말 안 듣고 도망도 가고, 그 나이답게 열심히 사는 애들을 보니 나도 힘내서 열심히 살아야겠더라고요. 내 부모가 주지 않은 사랑과 지지를 준 활동가들, ‘내가 네 엄마였다면 당장 가해자와 이혼하고 널 구했을 거야’라며 울어 준 한 생존자도 고마웠어요. 저희 책 펀딩에도 많은 분이 참여하셨는데, 우릴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더 살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40대가 된 명아는 대학에 다니는 한편, 역시 다른 생존자들과 연대하며 공부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20대 대학생 민지는 7세 때 처음 성폭력을 겪었다. 고등학생 때 엄마에게 피해 사실을 말했지만 별 변화는 없었다. 가족 대신 그를 돕고 지지한 건 다른 생존자와 상담사였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말해주시고, 제가 죽으려 했을 때도 도와주셨죠. 요즘은 친족성폭력 문제를 널리 알리고 싶어서 글을 쓰고 인터뷰도 해요. 미투 운동 후 성폭력에 대해 더 솔직히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지만 이 문제는 아직 잘 드러나지 않았어요. ‘악마의 짓’처럼 묘사되기도 해요. 우리 주위에서 정말 흔히 벌어지는 일인데도요.”

50대 푸른나비는 8살부터 10년간 성폭력을 겪었다.

“가해자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기독교 집안이라서 가족들은 늘 ‘영성의 마지막 끝은 용서’, ‘앞으로 나아가려면 용서하라’고 했어요. 50년이 지나서야 용서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달았죠. 말하기 전에 부모가 날 키워준 값부터 내놔야 하지 않나 고민하던 제게 ‘부모는 자식을 양육할 의무가 있다, 왜 갚을 생각만 하냐’고 말해준 상담사가 고마웠어요. 하지만 가족을 해체하지 않는 한 피해는 죽을 때까지 반복돼요. 저도 다른 가족을 통해 가해자의 소식을 꾸준히 듣고 있거든요. 천륜이 천벌인가 싶어요.”

“죽을 때까지 가해자와 분리 어려워...천륜이 천벌인가

생존자 보호하려면 친족성폭력 범죄 공소시효 없애야” 

친족성폭력 생존자 ‘푸른나비’의 그림 ‘기억’
친족성폭력 생존자 ‘푸른나비’의 그림 ‘기억’

푸른나비는 지난해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청와대 국민청원을 주도한 주인공이다. 생업을 중단하고 다른 생존자와 여성·시민단체를 찾아다니며 동참을 요청하고, ‘페미시국광장’에서도 발언하는 등 열정을 쏟았다. (관련기사▶ 친족 성폭력 생존자 푸른나비 “가정 내 범죄 묵인하는 이 나라 용서 않겠다” www.womennews.co.kr/news/193386) 청와대의 답변을 받진 못했지만, 요즘도 직장생활 틈틈이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해 싸우고 있다.

친족성폭력 피해자의 55.2%는 첫 상담을 받기까지 10년 넘게 걸렸다(한국성폭력상담소 2019 상담통계)는 통계가 있다. 자신의 경험을 ‘피해’나 ‘트라우마’로 인식하는 데에도 오래 걸리지만, 가족의 특성상 가해자/피해자의 분리가 어려운 현실, 생존자가 가해자에게 갖는 이중적인 양가감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존자들은 말한다. 가족관계를 끊기 어렵다면, 적어도 가족 내 성폭력 범죄에 공소시효를 둬선 안 된다는 요구가 높은 이유다.

“친족성폭력은 공소시효 없는 범죄여야만 해요. 2017년까지 성폭력 생존자 자조모임 참석자의 8~90%가 친족성폭력 피해자였어요. 정말 흔한 일인데, 제 또래 생존자들은 지금도 말 못 해요. 고소·고발할 힘도, 법적 안전장치도, 가족이란 자원 없이 혼자 살아갈 힘도 없거든요. 저는 겨우, 어떻게든 살아왔지만 다른 젊은 생존자들도 혼자 힘겹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기를 바라요.” (푸른나비)

“법적 대응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해요. 언제라도 생존자가 준비됐을 때 사건을 공론화할 수 있게 국가가 최소한의 안전망을 마련해줘야죠.” (정인)

“드디어 말할 수 있게 됐는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면 안 되잖아요.” (민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범죄인만큼 신고와 고소의 문턱이 더 낮아져야 해요. 가해자와 피해자를 즉시 분리하고 가해자의 친권을 박탈해야 해요. 생존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국가가 보호해야죠. 생존자가 실질적으로 자립할 방안도 모색하고요. 결국 가해자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려면요.” (명아)

친족성폭력 생존자 ‘조제’의 그림 ‘부서진 심장과 상처’
친족성폭력 생존자 ‘조제’의 그림 ‘부서진 심장과 상처’

“낙인·편견 없이 친족성폭력 말할 수 있는 세상 만들고파”

“우리 얘기가 누군가의 마음에 꽂힐 때까지 계속 말할 것”

생존자들과의 인터뷰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즘의 오랜 구호를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눈물을 훔쳤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두어 시간 내내 웃음과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네 명의 생존자는 “낙인도 편견도 없이 편안하게 친족성폭력을 말하고 이해와 지지를 받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불쌍히 여기”거나 “이제 와 어떡하냐”, “가족의 애정을 오해한 것 아니냐”, “가족 간 문제는 형사사법 제도가 아니라 사과와 용서로 해결해야지”, “왜 대놓고 그런 말을 하냐” 같은 반응엔 힘이 빠진다고 했다.

언어는 생존자들의 힘이자 무기다.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 필자들은 이후 각자 책을 펴낼 계획이다. 벌써 원고를 완성한 이도 있다. 심리학을 전공하고 상담 자격증을 따 상담 활동을 하는 생존자도,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생존자도 있다. 또 다른 생존자들과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예술인 등이 참여한 온라인 전시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전시 프로젝트 : 시간을 거스르다’도 이달 막을 올린다. 폭넓은 연대와 활동은 계속된다.

친족성폭력 생존자 ‘조제’의 그림
친족성폭력 생존자 ‘조제’의 그림

인터뷰에 참석하지 못한 생존자 ‘희망’은 이런 글을 보내왔다.

“저자로 참여한 건 제 삶의 증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스물둘의 제겐 아무도 없었지만 쉰둘의 저는 겪은 일을 증언해줄 수 있으니까요. (...) 처음에는 제 상처가 저를 찌르는 무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아픔을 이해하는 연결고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고통 안에 갇혀있지 않고 상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볼 때 시야가 더 넓어지고 깊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성폭력 경험이 없었다면 전 소수자의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재미있어요. 친족 성폭력은 인류 역사 내내 존재해온 문제일 거예요. 한 개인이 감당할 문제가 아니니 모두 힘을 모아주면 좋겠어요.” (정인)

“공부를 좋아했어요. 공학박사가 돼 연구소에서 머리 쓰는 일을 하며 살고 싶었어요. 하지만 (성폭력 경험이 없었다면) 세상의 부조리, 종교·철학·심리 상담 등을 배우고 고민하고 들쑤시고 다니는 지금의 나는 없었겠죠. 오히려 인생의 폭이 넓어졌고, 부조리에 맞서 싸워 나를 지키겠다는 힘과 자세도 얻었어요.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글을 쓰는 것도 어려웠는데 책 내고 끝난다면 너무 아쉬울 듯해요. 공소시효 폐지까지 꼭 끌어내고 싶어요.” (명아)

“저도 직접 겪지 않았다면 성폭력 문제에 무지한 채로 살아갔을 것 같아요. 지금도 불편한 주제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는 걸 계속 말하고 드러내고 싶어요.” (민지)

“그 일이 없었다면 전 전형적인 우아하고 조용한 중년 여성, 신심 가득한 집사로 살았겠죠. 하지만 약자로 살다 보니 말이 많아졌어요. 우리의 문제를 외면하는 국가에 돌을 던져 부숴버리겠다는 심정으로 살아요(모두 웃음). 다음 세대는 힘들게 살지 않도록 어른으로서 이건 잘못됐다고 얘기해야죠. 우리의 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꽂혔으면 좋겠어요.” (푸른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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