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운동과함께하는전북시민행동 등 연대단체들이 28일 전주지방법원 앞에서 ‘전북 문화예술계 박교수 성폭력 사건’ 항소심 선고 대응 기자회견을 열었다.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
미투운동과함께하는전북시민행동 등 연대단체들이 10월 28일 전주지방법원 앞에서 ‘전북 문화예술계 박교수 성폭력 사건’ 항소심 선고 대응 기자회견을 열었다. 단체들은 성범죄 피해자가 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 걱정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장치가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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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과정의 ‘2차 피해’ 막을 제도 미흡해

“피해자 보호 충분한가” 현장의 인식차도 커

대법원의 ‘성인지 감수성’ 판례가 무색하게도, 법관의 경솔한 언행으로 성범죄 피해자가 2차 피해를 겪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성범죄 피해자가 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 걱정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장치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 성폭력처벌법 등에는 피해자 진술과 심리 비공개, 피해자 증인신문 동안 피고인 퇴정, 피해자가 직접 법정에 출석하지 않고 비디오 등 중계장치를 이용해 증인신문 등 재판 과정에서의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규정이 존재한다. 모두 재판장의 재량에 달렸다는 게 문제다.

특정 법관이 불공정한 재판을 할 염려가 있다면 법관을 바꿔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형사소송법상 기피 제도다. 검사와 피고인이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들을 지원해온 권지현 (사)성폭력예방치료센터장은 제도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검사에게 기피 신청을 부탁해도 ‘특정 법관과 관계가 껄끄러워지면 다른 사건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염려해서 안 하는 경우가 많다.”

재판부의 권한과 무관하게 가해자가 법적 권리를 사용해 피해자를 법정에 불러내기도 한다. ‘n번방’ 피해자들도 최근 출석 요구를 받았다. 텔레그램에서 성착취물을 제작하고 돈을 받고 유포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검찰 측 증거에 동의 못한다, 증인의 진술을 직접 듣겠다”고 주장해서다. 증거에 대한 동의 여부는 전적으로 피고인의 권리다. 피해자의 증인신문은 지난 6월 11일 진행 예정이었지만, 피해자가 2차 피해 우려로 불출석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재판 현장의 모두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진 않는다. 대법원 젠더법연구회가 지난해 1~2월 판사·변호사 등에게 물어보니, “법정에서 피해자 보호가 충분하다”는 피해자 변호인은 없었지만, 법관은 12%, 피고인 변호인의 30.4%는 “충분하다”고 답했다.

9일 서울 대법원에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 의한 직장 내 성폭력 유죄확정 선고 후 기자회견이 열렸다.ⓒ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2019년 9월 9일 서울 대법원이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직장 내 성폭력 사건에 대해 유죄 확정 선고를 한 날, 대법원에는 방청연대와 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 60여명 넘는 시민들이 모였다.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eNd)은 올 초부터 가해자들의 재판을 감시·기록해 SNS 등으로 공개하고 있다. ⓒ트위터 캡처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eNd)은 올 초부터 가해자들의 재판을 꾸준히 감시·기록해 SNS 등으로 공개하고 있다. 이처럼 최근 성범죄 재판을 감시·기록하는 ‘방청연대’가 활기를 띠고 있다. ⓒ트위터 캡처

 

사법부의 ‘성인지 감수성’ 강조하는 시대

2차 피해 우려 없이 재판 참여할 제도적 장치 마련해야

최근 성범죄 재판을 감시·기록하는 ‘방청연대’가 활기를 띠면서, 가해자 쪽으로 기울어진 재판부의 변화를 끌어낼지 주목받고 있다. 성범죄 피해자 연대자들은 “사법부의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려면 ‘방청연대’ 같은 외부의 압력도, 사법부 자체 교육·훈련도, 피해자가 법정에서 실효성 있는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제도적 방안도 필요하다”고 했다.

‘피해자가 2차 피해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포함하고, 국가·지자체·수사기관의 2차 피해 방지 의무를 명시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서 “사법부의 의무가 빠져선 안 된다”고 권 센터장은 지적했다. “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를 겪은 피해자들은 문제 제기도 못 하고, 보상도 못 받은 채 ‘이런 재판 다신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사법부가 가해자가 된 경우에는 분명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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