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가해 재판” 여성단체 비판받은
‘연극계 미투’ 항소심 전주지법 재판부의 ‘말말말’
사법부의 ‘성인지 감수성’ 필수인 시대
2차 피해 우려 없이 재판 참여할 제도적 장치 마련해야

대법원의 ‘성인지 감수성’ 판례가 무색하게도, 법관의 잘못된 언행으로 성범죄 피해자가 2차 피해를 겪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Pixabay
대법원의 ‘성인지 감수성’ 판례가 무색하게도, 법관의 잘못된 언행으로 성범죄 피해자가 2차 피해를 겪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Pixabay

“진술보다 확실한 건 증거 아니겠습니까!”

“(성폭력) 사건 당일 왜 아무런 조치도 안 취했습니까?”

성범죄 피해로 재판을 받는 당신에게 판사가 이런 말들을 한다면 어떨까. 2020년 대한민국 성범죄 재판정에서 실제로 울려 퍼진 말들이다.

믿기 힘든 발언의 주인공은 전주지법 제1형사부 재판부(강동원 부장판사)다. 2018년 전북 연극계 미투 운동으로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돼,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된 박모 전주대 교수의 항소심 심리를 맡았다. (관련기사▶ 항소심서 뒤집힌 ‘연극계 미투’...여성·시민단체 “판사 성인지감수성 문제” 반발 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3646) 이 소송에 연대한 (사)성폭력예방치료센터, 전북여성단체연합 등 여성·시민단체는 재판부가 재판 과정에서 성인지 감수성 부족을 드러내며 ‘2차 가해’를 저질렀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해왔다.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이들 단체의 도움을 받아 살펴봤다.

ⓒ이세아 기자
ⓒ이세아 기자

 

피해자·가해자를 기어이 붙여놓고

전주지법 재판부는 4월 17일 첫 공판부터 “피고인의 인생이 걸린 문제”라며, 1심에서 이미 증언했던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을 재소환했다. 5월 29일 피해자 증인신문 당일, 피고인은 법정에 머물렀다. 피해자 측이 피고인 퇴정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마주 보지 않도록 비대면을 요구했으나 역시 거부됐다. 검사의 항의로 겨우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가림막을 설치했을 뿐이다. 피해자는 가림막 너머 피고인의 탄식과 말소리를 들으며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여기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2018년 7월 7일, 비서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두 번째 공판이다. 당시 서울서부지법형사합의11부(조병구 부장판사)는 피해자 보호를 위해 비공개로 증인신문을 했으나,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하진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가림막을 쳤을 뿐이다. 피해자 김지은 씨는 저서 『김지은입니다』에서 그때를 회상하며 “공포스러웠다. 가해자의 숨소리, 움직이는 소리, 기침 소리가 들려서 가해자 옆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덜덜 떨면서 진술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성폭력 후 왜 아무 조치 안 했냐” “외간 남자”

피해자에 대한 통념 드러내

강 부장판사는 5월 29일 증인신문 과정에서 소환된 피해자 가족에게 “남편으로서 사건 당일 아무런 조치도 안 취했습니까? 화가 나거나 분노가 일지 않았습니까?” “(아내가) 외간 남자를 만나러 갔는데 남편이 어떤 말을 안 했어요?”라고 물었다.

현장에 있었던 여성·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협한 통념을 드러냈다”고 한숨을 쉬었다. 성폭력 피해자나 그 주변인은 사건 초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워하거나 오히려 회피하려 하기도 한다. 2018년 대법원의 ‘성인지 감수성’ 판례는 이러한 성범죄의 특수성에 주목했다. 대법원은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배제하고 ‘성인지 감수성’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피해자가 가해자 중심적 환경 속에서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취업 결정권을 쥐고 있었고, 그 위력을 이용해 피해자를 불러내 성폭력을 저질렀는데도 단순히 ‘외간 남자를 만나러 갔다’고 한 점도 문제적이다. 여성·시민단체들은 “위계에 의해 발생하는 성폭력의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남녀 간 성 문제로 바라보는 재판부의 가부장적 인식 수준을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진술보다 증거” 성범죄 특성 외면

“진술보다 확실한 건 증거 아니겠습니까!” 6월 19일 공판준비기일, 강 부장판사는 방청연대차 온 시민들을 보며 호통치듯 말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활동가들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성범죄 사건은 대개 물적 증거가 없다. 유일한 증거가 피해자 진술인 경우가 많다. 대법원의 ‘성인지 감수성’ 언급 이후 성범죄 피해자가 사건 후에도 가해자와 가깝게 지냈거나, 세부 진술이 사실과 다르다는 이유로 피해자 진술을 함부로 배척해선 안 된다는 판례들이 쌓이고 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1심 무죄 판결이 2심에서 뒤집힌 것도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과 신빙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성폭력 수사 재판 과정을 모니터링해온 박윤숙 한국성폭력위기센터 소장은 “성폭력 피해의 객관적 증거를 요구하고, 폭행이나 협박 여부, 피해자가 저항한 정도, 피해 후의 태도를 판단하려는 법원의 태도는 ‘성폭력은 피해자의 책임’이라는 개념, 여성의 정조 개념에 기반해 판단하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것”이라며 “반면 성인지 감수성을 유지한 판례들은 그 지점을 피해자 맥락, 피해자 입장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설명했다.

 

‘방청연대’ 시민들엔 “여론몰이” 반발

강 부장판사는 8월 14일 공판 방청연대를 하러 온 시민 50여 명에게 “재판이 증거로 하는 것이지, 여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라며 소리쳤다. 여성·시민단체들은 “방청연대의 목적은 피고인의 재판에서 사라지기 쉬운 피해자의 권리가 잘 보장될 수 있도록 지켜보고 기록하는 것이다. 재판 방청은 시민의 알 권리이기도 하다. 재판부는 권리를 존중해야 함에도 되레 호통치고, 증인으로 나온 피해자가 신청도 하지 않은 비공개 재판을 유도했다”고 비판했다. 여성신문은 위 내용과 관련해 강 부장판사의 입장을 물었으나, “답변하지 않겠다” “모른다”는 답변만 받았다.

 

(이어보기▶ 성범죄 피해자 두 번 울리는 법정...“2차가해 막을 제도적 장치 필요”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3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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