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경성여의전 실험실 모습.
1940년대 경성여의전 실험실 모습.

 

1900년 첫 의사 김점동(박에스더) 출현 후 1917년 허영숙이 일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기까지 한동안 여의사는 맥이 끊어져 있다. 다만 그동안 남자들은 1886년 4월 10일의 제중원 의학당 시작과, 그 후 간헐적으로 연결된 교육, 1899년 9월 개교한 3년 속성과정 (관립)의학교와 에비슨의 1900년 이후 정식 제중원 의학교육의 연결로 세브란스병원 의과대학(Severance Hospital Medical College)의 의학박사(Doctor of Medicine and Surgery) 학위를 받는 1908년 6월 3일 첫 졸업생 7명이 탄생하며 본격적 정식의사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여의사는 제중원 여의사 에바 휠드가 1900-1901년 여학교 학생 중 똑똑한 몇 명을 교육하고자 2명을 제중원 의학당에서 교육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이제 1918년 허영숙 귀국부터 연이어 배출되는 일제강점시절 여의사 이야기부터 간략하게 살펴본다. 

1940년대 경성여의전 학생들의 실습 모습.
1940년대 경성여의전 학생들의 실습 모습.

 

일제 강점기 의학교육과 여의사 활동

박에스더의 사망 이후 1917년(여러 관련 논문들에 1917년, 1918년으로 다르나 기창덕의 논문이 동경여의전 학적부에 근거하므로 그를 차용한다)까지는 대가 끊겼다. 제중원 의학당, 세브란스병원의학교와 (관립)의학교에서 여성을 받지 않았고, 여성을 위한 공식적인 의학교육기관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의사가 되고자 하는 여성들은 외국, 주로 일본에 유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였다. 일본에는 1900년 시작된 동경여자의학교가 발전하여 1912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로 되었다. 꿈 많고 출중한 많은 여성이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모두 59명으로 동경여의대 자료실 학적부에 기록되어 있다.

1928 동경여의전 1호 유학 여의사 허영숙과 춘원 이광수 가족.
1928 동경여의전 1호 유학 여의사 허영숙과 춘원 이광수 가족.

 

그 첫 번째 여성이 한국 근대문학의 대가인 이광수의 부인으로 알려져 있는 허영숙으로 1917년 동경여의전을 졸업하여 일본에서 공부한 첫 번째 여의사다. 귀국하여 1918년 10월 조선총독부 시행 의사검정고시를 치른 후, 1920년 5월 조선에서 여의사 처음으로 산부인과와 소아과를 표방한 영혜의원(허영숙의 영과 광혜원의 혜를 넣어)을 개원하였다. 한편 한국 내에서는 1914년 조선총독부의원양성소(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에서도 로제타 홀의 간청으로 3인의 여학생(안수경, 김해지, 김영홍)이 청강생이 되어 2018년 졸업과 함께 자동으로 면허를 취득하고 있었다. 국내 의학교육기관에서 교육받고 의사가 된 최초 여의사들이다. 

1933년 경성여자의학강습소 1회 졸업생 박순정 의사시험합격증.
1933년 경성여자의학강습소 1회 졸업생 박순정 의사시험합격증.

 

일본 유학을 통한 여자 의사교육

동경여의전은 허영숙 이후로 1919년 임행, 1920 정자영, 1921 현덕신(현신덕?:논문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1922년 박정, 그리고 1923 송복신, 한소제, 길정희, (유영준: 기창덕의 논문에는 이름이 없다), 1924 이덕요, 1925 전혜덕이 졸업한다. 한동안 졸업생 배출이 없다가 다시 1930년부터 해방 전까지 모두 59명 졸업생들이 나왔다고 기창덕의 1994년 논문 ‘의학계의 해외유학생’은 소상히 전한다.

1923년 동경여의전을 졸업한 길정희, 한소제, 유영준을 잠시 살펴보자. 유영준은 동경유학시절 ‘여자계’라는 여성지의 편집을 하기도 했으며 일찍이 안창호와의 교류 등으로 독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한다. 한소제는 동경여의전 졸업과 미국 유학 후 귀국하여 YWCA 등 여러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해방 후 한국걸스카우트연맹의 전신인 대한소녀단을 세우고 기틀을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길정희는 우리나라 여성의학교육에 반석을 세운 공적이 대단하다. 동경여의전 시절 로제타 홀의 일본 방문에서 싹튼 인연으로 로제타가 창설한 경성의학강습소(1928년 창설)의 부소장으로, 1933년 닥터 홀이 은퇴하고 미국으로 떠난 후에는 남편 김탁원과 함께 의학강습소를 인수하여 경제적인 난관에도 불구하고 지인들과 협력하여 제3회까지 졸업생을 배출하며 조선총독부 의사 검정고시에 합격시켰다. 1934년 동경여의전을 졸업한 손치정은 후에 대한여자의사회 초대회장을 역임하였다. 1942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한국 최초의 여자 의학박사다.

두 번째로 많은 한국 여학생이 졸업한 학교는 1925년 창설된 제국여자의약전문학교다. 2차 대전 후 남녀종합대학인 동방대학이 된 이 학교는 동경여의전보다 역사가 짧다. 장문경, 김용희, 문성 3명이 최초로 입학한 한국유학생이며 동시에 1930년 1회 졸업생이다. 해방 전까지 이 학교를 졸업한 한국 여성은 36명에 달한다. 김용희는 로제타의 권유로 이 학교로 갔다 한다. 장문경은 1934년부터 서울 관훈동에 정화산부인과의원을 개업하며 장학사업도 하였는데 1983년에는 장학법인 장문경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42년 졸업한 최옥자는 1947년부터 교육계에 투신, 1961년부터는 수도여자사범대학장으로서 의사로 활동하기보다 교육계에서 활동하였다. 세종대학교로 발전시켰으며 노년기에는 목사로, 화가로 활약하며 세종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오오사카여자고등의학전문학교는 1928년 설립인가를 받아 1933년에 1기 졸업생을 내 학교인데 한국인 여성들은 초창기부터 진학하였다고 한다. 더 많은 졸업자가 있을 것으로 사료되지만 관서의과대학 동창회명부에 의하면 1935년 박봉성을 필두로 1944년까지 6명의 명부가 있다.

국내 여자 의학교육

1. 제중원의학교

1886년 16명의 학생으로 의학교육이 시작된 이래 제중원의학교는 세브란스병원의학교(Severance Hospital Medical College)로 불리게 되고 1908년 6월 에비슨에 의해 조선 최초의 면허 의사인 첫 졸업생 7명이 배출된다. 이때 의술개업인허장(의사면증)을 수여하며 시작된 의사면허제도는 1909년 (관립)의학교 졸업생들에게도 소급 적용되어 발부되기 시작하였고, 1914년 새로 의사면허증 제도가 시작되기까지 144명에게 발부되었다고 박형우는 ‘한국근대서양의학교육사’에서 전한다. 한편 세브란스의대에서 여의사 배출은 43회 졸업식인 1953년에야 이루어진다.

2. 경성의학전문학교

1899년 (관립)의학교 설립으로 시작되어 1907년까지, 그후 대한의원 부속 교육부, 의육부를 거쳐 1909년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가 되었다. 1910년 일제 강점기 들어서며 조선총독부의원양성소(의학강습소)로 강제 강등당했다가 1916년 4월 정규전문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아 경성의학전문학교로 개칭되었다. 후에 1926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개설되었다. 1925년 고수선, 윤보명이 총독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 동경여의전을 다니다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편입하여 의사가 된 고수선은 독립운동뿐 아니라 고향인 제주에서 제주 여자청년회를 조직하여 신생활운동 등 사회사업, 여성운동을 하였다.

3. 경성여자의학강습소

일찍이 1913년 로제타 홀과 메타 하워드가 평양 광혜여원에 여성의학반을 설치, 의사되기를 원하는 소녀들에게 기초교육과 실습교육이 시도된 바 있다. 1928년 동대문부인병원장이던 로제타는 동경여의전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동대문 부인병원에 있는 길정희와 상의하여 여자의사 교육기관을 본격적으로 설립을 도모했다. 이화전문 교의인 유영준, 여의사 현덕신을 비롯, 뜻을 같이 하는 이상재, 윤치호 등 각계 도움을 요청했다. 1928년 5월 19일 조선여자의학전문학교 창립총회를 갖고 1928년 9월 4일 경성여자의학강습소 개소식을 하였다. 소장 로제타 홀, 부소장 길정희로 시작한다. 장소는 로제타의 남편 윌리암 홀의 해주요양병원 간호사이던 선교사 엘라 루이스(Miss Ella Lewis)의 양옥 2층을 빌렸다. 강습소 비용은 로제타 홀이 부담하였다. 당시 강사진은 각 의학전문학교 한국인 의사들이 무료로 강의하였다. 1934년 1회 졸업생 5명 중 박순정과 임용화는 1933년 이미 의사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4.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로제타 홀이 1933년 선교사로 정년을 맞아 미국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경성여자의학강습소는 길정희가 남편 김탁원의 도움을 받아 함께 맡게 되었다. 빌려 쓰고 있던 창신동 루이스 집이 선교사업으로 쓰이게 되어 이사하게 되면서 종로구 관철동 410번지 태화관(중국요리점)을 구입하여 강습소와 병원을 함께 운영하였다. 로제타가 귀국하며 감리교재단 지원도 종식되어 강습소 운영은 힘들어졌다. 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시키는 방안을 강구하며 정구충 등 유지들과 함께 1934년 재단법인 설립위원회를 발족하였으나 총독부 반대로 강습소 지속도, 전문학교 승격도 어려웠다. 그러나 전라남도 순천 부호인 우석 김종익의 유언으로 파격적 거액의 65만원 기부와 미망인 박춘자여사가 10만원을 더 출자하고 주변의 기부와 총독부에서 일본인 학생을 일정수준 입학시킨다는 조건으로 개교하게 되었다. 교사는 명륜동 국립 경성고등상업학교에 건물개축 후 1938년 5월 개교하였다.

대한민국 여의사 역사에 기념비적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조선여자의학강습소, 경성여자의학강습소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발전 여정의 헤아릴 수없이 많으며, 놀라운 열정과 헌신의 뒷 이야기들을 이번 연재에서는 소개하지 못함이 안타깝지만 짧은 소개로 마무리한다.

5. 검정고시합격자

의학강습소에서 또는 독학으로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검정고시에 합격, 의사가 된 여성들도 30여명 있었다. 1933년 의사검정고시에서 경성여자의학강습소 출신의 박순정, 임용화를 필두로 의학강습소 출신이 21명이었고 독학으로 공부하여 응시, 합격한 여성은 김금선, 신금자, 윤영은, 이인숙, 정남술 등 7명이라 한다. 검정고시제도는 1946년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근대시기 여의사들이 주로 담당했던 분야는 산부인과, 소아과였다. 여의사가 되는 과정도 힘들었지만 사회 편견은 물론, 가정과 일을 양립하는 어려움 역시 매우 컸다. 대단한 의지로 그녀들은 의료활동과 여성운동, 3.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 사회계몽운동에 맹렬한 열정으로 참가하였다. 근대 여의사들은 여성과 미래세대 교육, 여성운동의 최일선, 전문가로서 인술을 펼치며 생명을 구하고 나아가 사회와 나라를 구하는 운동을 펼쳤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그간 근대화 시기 여성의학교육과 여의사에 대한 여러 연구와 저서들이 열정적 연구자들의 연구로 맥을 유지해 왔으나 인용 자료들의 상이함도 있고 한국의료사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부분은 극히 일부로 주 연구는 남성 중심의 연구였다. 여성의료사 연구논문은 연구마다 다른 사항이 많고 아직 철저한 고증이 안된 부분들이 많아 체계적인 연구가 아쉽다. 앞으로 많은 연구자에 의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서 여성의료사가 근대는 물론 고대, 현대의 여성의료사까지도 제 모습을 들어내기를 염원해 본다.

 

 

필자: 안명옥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전 국립중앙의료원 원장, 17대 국회의원
필자: 안명옥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전 국립중앙의료원 원장, 17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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