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페미니스트 기혼여성 모임 ‘부너미’
평범한 여성들 글쓰기 모임으로 출발
출판·교육 사업으로 확장 계획도
법제도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내 곁의’ 불평등 바꾸는 게 목표
페미니스트도 결혼해 행복할 수 있어야
여성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가부장제의 덫에 빠지지 말았으면

결혼한 여성들의 페미니즘 탐구모임, ’부너미‘. 법제도만으론 바꿀 수 없는 일상 속 불평등을 바꾸려 노력하는 여성들이 모였다. ⓒ부너미 제공
결혼한 여성들의 페미니즘 탐구모임, ’부너미‘. 법제도만으론 바꿀 수 없는 일상 속 불평등을 바꾸려 노력하는 여성들이 모였다. ⓒ부너미 제공

2020년 한국의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적극 추진하는 행동강령은 4B(비연애, 비섹스, 비혼, 비출산)다. 비혼을 넘어 ‘반혼’도 등장했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뜻을 넘어, ‘가부장제를 존속시키는 결혼제도를 거부한다’는 더 강한 표현이다. 빠르게 퍼져가는 비혼/반혼 담론과 ‘여성연대’는 모든 여성을 환영하지 않는다. 결혼한 여성은 ‘가부장제의 부역자’로, 그 아들은 ‘한남 유충’으로 낙인찍는 일이 흔하다. 기혼 페미니스트란 정말 모순일까? 

결혼한 여성들의 페미니즘 탐구모임, ’부너미‘가 답했다. “여성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게 가부장제의 덫이죠. 더 많은 삶의 선택지를 위해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싸웁시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며 행복하게 사는 삶도, 결혼제도 바깥에서 잘 사는 삶도 똑같이 페미니즘의 목표일 수 있다고 이들은 강조했다. 법제도만으론 바꿀 수 없는 일상 속 가부장제의 관습과 성 역할에 용감하게 맞서서 조금씩 내 ’곁을 바꾸는 운동‘, 부너미가 말하는 페미니즘이다.

2017년 말 기혼여성들의 작은 독서모임으로 출발한 부너미는 요즘 주목받는 페미니즘 글쓰기 공동체 중 하나다. 한옥을 데우려고 아궁이에 불을 땔 때, 온기가 역류하지 않게 막아주는 ‘부넘이’에서 딴 이름이다. 페미니즘이 역류하지 않고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실천적 논의를 하자는 뜻이다. 지난해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올 4월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까지, 결혼한 여성들의 진솔한 페미니즘 에세이집을 잇따라 펴내 화제를 모았다. 지난 8월부터 여성신문 SXF(섹스X페미니즘) 칼럼 연재에도 참여하고 있다. 최근 출판, 교육, 독서모임 사업자 등록도 마쳤다.

분주한 활동은 무엇을 남겼을까. 남편들이 변했다. 가족들도 변했다. 가장 즐거운 변화는 스스로의 성장과 유연함이다. ‘더 나은 엄마’, ‘더 나은 아내’가 아닌 ‘더 나은 나’가 되려고 공부하고 말하고 쓰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이성경 부너미 대표, 이예송 씨, 유지은 씨가 각자의 일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들려줬다.

2017년 말 기혼여성들의 작은 독서모임으로 출발한 부너미는 요즘 주목받는 페미니즘 글쓰기 공동체 중 하나다. 사진은 부너미 모임 현장의 모습. ⓒ 부너미 제공
2017년 말 기혼여성들의 작은 독서모임으로 출발한 부너미는 요즘 주목받는 페미니즘 글쓰기 공동체 중 하나다. 사진은 부너미 모임 현장의 모습. ⓒ 부너미 제공
부너미는 2019년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2020년 4월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이라는 페미니즘 에세이집을 잇따라 펴냈다. ⓒ부너미 제공
부너미는 2019년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2020년 4월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이라는 페미니즘 에세이집을 잇따라 펴냈다. ⓒ부너미 제공

 

- 부너미는 ‘곁을 바꾸는 페미니즘’을 지향하죠. 지난 약 3년간 여러분의 ‘곁’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예송 :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에서 출산 전후의 고통과 ‘엄마의 희생’에 대해 썼는데, 어머니가 그걸 읽고 아버지께 처음으로 “나 더는 밥 못 차린다”고 선언하셨대요. 동년배 여성들과 독서모임도 여셨고요. 남편은 육아에 빠졌어요. 이번 주 휴가였는데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목표’라며 애 곁을 떠나질 않더라고요. 어린이집 데려다주고 챙기는 일도 남편이 해요. 선생님도 알림장에 ‘어머님’ 아니고 ‘아버님’이라고 쓰시고요. 애도 아빠를 먼저 찾아요. ‘애는 여자가 잘 본다’던 시아버님도 인정하시는 것 같아요. 책 홍보할 때 남편이 자기도 ‘페미니스트’래요.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아요.

성경 : ‘니 팔자가 좋아서 책 읽고 노는구나’ 하던 가족들이 책이 나오고 긍정적 후기가 나오니까 변하더라고요. 남편도 시가도 절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글을 계속 쓰는 데 굉장히 힘이 돼요. 사실 책에 쓴 얘기는 제가 가족들에게 평소 하는 말의 1/100도 안 되는데 말이죠. 하하. 글의 힘을 한번 실감하고 나니까 계속, 더 잘 쓰고 싶어져요.

지은 : 제 남편은 저를 만나고 동등한 관계가 주는 새로운 즐거움에 눈을 떴어요. ‘여자는 섹스를 몰라야 한다’ ‘섹스는 남자가 리드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렸죠. 서로가 만족할 때까지 터놓고 대화하고 노력해요. 동등한 섹스만으로 얼마나 많은 게 바뀌는데요. 지난해 방영된 MBC 다큐 ‘아이 엠 비너스(I am Venus)’에도 같이 출연했어요. 가부장제 속 억압된 여성의 몸과 성(性)을 조명한 다큐인데, 저희의 성생활에 대해 이야기했죠.

성경 : 그 다큐, 부너미 남편들 다 봤어요. 저도 남편이랑 보면서 ‘당신 저렇게 할 수 있어?’ 물었죠. 하하. 페미니스트와 살다 보니 남편들도 바뀌어요. 저더러 ‘진짜 유별나다’던 남편도 부너미 사람들을 만나고 ‘여자들이 아니라 내가 문제였구나’ 깨달았나 봐요. 회원들의 글을 읽고 평등한 부부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남편들도 있고요. 작년 부너미 가족동반 파티 땐 남자들이 애들 보고, 여자들은 따로 커피 마셨어요. 그런 풍경이 어색하지 않다는 걸 다들 점점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지은 : 남자들이 뒤처지는 걸 싫어하잖아요. 부너미 모임에 같이 나가면 다른 남편들을 보고 자극받아서 열심히 노력하더라고요(모두 웃음).

성경 : 남편들끼리 경쟁시켜야 해(모두 웃음). 제 남편이 김장을 자주 해요. 열무 나오면 열무김치, 파 나오면 파김치. 주변에서 많이 띄워주죠. 이런 남자가 어딨냐고. 그러면 ‘너 귀 씻어’ 해요(모두 웃음). 다른 사례를 들려줘요. ‘오늘 부너미 가니까 누구 남편이 김치 담근다더라, 누구는 바이브레이터를 그렇게 잘 쓴대. 너는 뭘로 승부할래?’ (모두 웃음)

이거 중요해요. 남성들이 어떻게 해야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지, 평등한 부부 관계를 만들 수 있는지 몰라요. 롤모델이 없잖아요. 돈만 많이 벌어오면 단 줄 알죠. 제 남편도 ‘우리 아버지가 나랑 놀아주신 적 없어서 나도 어떻게 애랑 놀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간단해요. 충분한 시간과 의지만 있으면 돼요. 저는 일부러 주말마다 외출해서 아이와 아빠가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만들었어요. 효과가 있었어요.

예송 : 제 남편도 SNS 인플루언서 ‘OO파파’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육아를 하는지 찾아보고 ‘저 남자 멋있다, 나도 더 잘할 수 있다’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애를 사랑하니까 자기가 알아서 이것저것 찾아보고 열심히 해요. 여자들은 ‘좋은 엄마 콤플렉스’, ‘슈퍼우먼 콤플렉스’ 내려놔도 돼요. 저도 아직 자유롭지 못하지만 극복할 필요가 있어요.

성경 : 사실 애들이 주는 기쁨이 정말 커요. 어디서도 못 얻는 사랑이에요. 남편이 그 기쁨을 알고 나니까 등 떠밀지 않아도 먼저 애들에게 가더라고요. 오늘 저는 인터뷰하러 나왔지만, ‘힘든 일 떨치고 나왔다’가 아니라 ‘애들과 있는 남편이 정말 행복하겠다’고 생각해요. 언론에서도 육아를 서로 떠넘기는 힘든 일로 그릴 때가 많은데, 바꿨으면 좋겠어요.

『여자들의 섹스북』 저자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를 초청해 강연을 듣고 있는 부너미 회원들의 모습. ⓒ부너미 제공
『여자들의 섹스북』 저자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를 초청해 강연을 듣고 있는 부너미 회원들의 모습. ⓒ부너미 제공

부너미가 알려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여성들이 늘었다. 초면에도 자기 이야기를 말하고 쓰다 보면 눈물을 터뜨리는 이들이 많다. “결혼 생활하며 느낀 부조리와 답답함을 어떻게든 나의 언어로 설명하고 싶어서, 숨 좀 쉬고 살자는 간절함에 찾아오는 여성들이 많다. 평범한 글쓰기 모임이지만 자세히 보면 삶을 성찰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치열한 투쟁의 과정”이라고 이 대표는 말했다.

 

- 부너미의 활동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즘 슬로건과 맞닿아 있습니다. 긍정적인 반응도 많지만, ‘기혼여성은 가부장제 부역자’라는 비난도 최근 등장했는데요.

성경 : 대결 구도의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저는 4B 운동을 지지해요. 여성은 모든 곳에서 안전하고 평등하게 살 수 있어야 하니까요.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표는 삶의 선택지를 늘리는 거잖아요. 4B를 지키는 삶도, 사랑하는 사람과 잘 사는 삶도 그 선택지에 들어가야죠.

지은 : 4B 운동을 하는 여성들이 기혼여성들에게 갖는 배신감, 그게 가부장제의 덫이에요. 여성들끼리 착취하고 싸우게 만들죠. 함정에 빠지지 말고 공동의 적에 맞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 할 수 있는 싸움을 하면 좋겠어요. 내 시아버지가 누군가의 직장 상사일 수 있잖아요. 내 용감한 목소리가 시아버지의 부하 직원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죠.

예송 : 후배들이 그래요. ‘언니, 결혼하면 내 삶은 없죠?’ ‘애 낳으면 불행하죠?’. ‘애 키우며 일하는 언니가 대단한데 전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결혼제도는 여성이 희생하는 구조라는 인식이 강해요. 그럴수록 뒤에 올 여성들의 선택지는 줄어들죠. 우리 후배들, 딸들이 결혼해도 행복해야 하잖아요. 그러려면 누군가는 지금 이 안에서 싸울 수밖에 없다고 믿어요.

성경 : 싸움의 방법은 여러 가지잖아요. 우리는 법제도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디테일한’ 불평등을 바꾸기 위해 싸워요. 남자들이 육아휴직 제도가 없어서 안 할까요? 내 쓰레기는 내가 치우는 습관, 부부간 평등과 존중에 기초한 섹스를 법제도로 만들 수 있나요? 모여서 이런 사소한 고민을 말하고 토론하고 글 쓰다 보니, 분노를 넘어 새로운 관점으로 문제를 볼 수 있는 여유, ‘이렇게 하면 바꿀 수 있다’는 노하우와 유연함도 생겼어요.

고민도 많아요. 오래 곱씹은 악플이 있어요. ‘화목한 가정에 왜 분란을 일으키냐. 너는 가정파괴범이다’였어요. 여성마다 처한 삶의 조건이 다른 현실을 고민하는 계기가 됐죠. 이제는 단순히 ‘같이 싸우자’보다 ‘각자가 가진 자원에 따라 전략을 달리하자’고 해요. 남편과 말이 안 통하고, 가정폭력 위기에 처한 여성, 자립할 기반이 없는 여성들도 있을 테니까요.

요즘 부너미 회원들은 읽고 쓰기뿐만 아니라 달리기, 등산, 스케이팅 등 다양한 운동도 함께 한다. 지난 4일 부너미 회원들은 책 『김지은입니다』를 읽고 등산도 하면서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부너미 제공
요즘 부너미 회원들은 읽고 쓰기뿐만 아니라 달리기, 등산, 스케이팅 등 다양한 운동도 함께 한다. 지난 4일 부너미 회원들은 책 『김지은입니다』를 읽고 등산도 하면서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부너미 제공

요즘 부너미 회원들은 읽고 쓰기뿐만 아니라 달리기, 등산, 스케이팅 등 다양한 운동도 함께 한다. 새로운 출판 프로젝트에 양육자 교육 사업 등 활동 영역도 점차 넓힐 계획이다.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여성들의 대담하고 생기발랄한 도전은 계속된다. 인터뷰를 마치고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 “결혼한 여자의 페미니즘이 우리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이 세상을 좀 더 자유로운 곳으로 바꿀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모두에게 페미니즘을,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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