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등도 기억하지 않는 사회에서
그나마 공정이라는 단어가
‘실패’에 서사를 부여했고
납득할만한 이유를 제공하고,
얼마간의 몫을 줬다”

 

“인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세계를 이름 짓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학생 때 읽은 파울로 프레이리의 글은 나를 두근거리게 했었다. 당연시 되어온 것을 전복하는 것이 시원했다. 세상을 나 스스로 읽어도 된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나는 교실에서 학생들이 내가 느꼈던 두근거림과 숨 트임을 받길 기대하며 이 글을 함께 읽었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었다. “이런 책 쓰는 사람이 부적응자 아닌가?” 소그룹 토론 시간에 청소년의 질문 아닌 질문이었다.

때로 청소년은 하나의 집단처럼 이해된다. 사회적 소수자를 인지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10대는 새로운 미래를 가져올 톡톡 튀는 집단이었다가,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로 무장한 집단이 된다. 하지만 청소년은 그 자체로 개별적이고 고유한 개인들이며,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토론에서 드러난 청소년들의 입장도 그랬다. 청소년에 대한 사회의 배제와 통제에 분노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게으르고 스스로 뭐가 필요한지 모르기 때문에, 정해진 게 있으면 그것만 최선을 다해서 하면 되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부적합하다고 판단하는 청소년도 있었다.

이런 일은 그 후로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입시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노력에 대한 사회의 담론을 비틀어 보려고 할 때도 그랬다. “가족의 경제적 배경이 성적에 영향을 미친다고는 해도 다들 스마트폰 쓰던데, 패배자의 변명 아닌가?” 라든가, “그래도 나보다는 노력했으니 나보다 좋은 대학에 간 것”이라든가 하는 반응들이 종종 등장했다. 몰라서 그런가 싶어 공정함이나 능력의 임의성과 사회적 맥락의 복잡성 등을 설명했지만, 충분한 변화가 늘 목격되지는 않았다. ‘부적응자’가 만들어 온 사회적 진보에 대한 설명도 때로 공허하게 울렸다. 물론 청소년이나 청년이 보수적일 수 있다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다. 청소년 역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지배문화의 영향권 안에 위치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청소년 본인이 사회가 말하는 ‘패배자', ‘억압받는 자'의 입장에 있을 때도 중심문화의 기준이 옳다고 판단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학생의 위치에 있음에도 배우는 이가 주체로서 세상에 개입할 수 있다고 말하는 프레이리를 ‘부적응자’로 이름 지었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노력의 허구성을 설명해도, 자신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아서 소위 명문대에 가지 못한 거라고 결론 짓는 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호하고 변호할 기회조차 사회가 박탈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공정함은 ’내 것을 빼앗지 말라’고 주장할 때만 차용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합격자보다 탈락자가 다수임을 고려할때, 공정함은 어쩌면 후자를 위해 더 많이 기능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교실에서 목격한 공정함은 나의 ‘실패’, ‘낙오’ 그리고 그에 따른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소화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다 보니 타인이 겪는 차별을 외면하면 내가 배제당할 차례가 올 때 사회가 손 내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설득은 통하지 않는다. 이미 철저하게 등급제, 순위제에 따른 굴욕을 견디며 살아온 그들이다. 2등도 기억하지 않는 사회에서, 순위권 밖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준 적이 없다. 그나마 공정이라는 단어가 ‘실패’에 서사를 부여했고. 납득할만한 이유를 제공하고, 얼마간의 몫을 줬다. 그런데 내가 배제되어 온 시간이, 자격 없는 자로 취급받아온 일이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임의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라면 그저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공정에 대한 요구는 얼마나 하면 최선인지 알 수 있는 기준, 말하자면 삶에 대한 최소한의 통제권에 대한 호소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소위 공정성에 분개하는 지금의 청년들을 보며 기성세대는 염려스러운 시선을 보내지만, 각자도생의 추구와 능력주의에 기반한 차별은 차곡차곡 누적되어 왔다. 청년들의 이기주의를 걱정하는 사람 중 능력주의 모순의 덕을 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동물행동학자 조너선 밸컴은 물고기가 날카로운 바늘에 걸린 미끼를 계속 무는 것은 통증을 못 느끼거나, 기억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물고기가 미끼를 무는 것은 그 통증에도 불구하고 가혹할 정도로 허기에 시달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끔 이 사회가 거대한 ‘허기’에 시달리는 것 처럼 보일 때가 있다. 평등이 편리하게 특정 영역에만 멈춰있길 바라는 것은 허기를 가속화 한다. 비인간적인 공정을 주장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상상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함세정 하자센터 10대 연구소 판돌·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겸임교수
함세정 하자센터 10대 연구소 판돌·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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