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 여성]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위대하고도 개인적인 유산
[세계 속 여성]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위대하고도 개인적인 유산
  • 장은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국제개발협력센터장
  • 승인 2020.09.21 19:35
  • 수정 2020-09-21 2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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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진보 진영의 아이콘이자 선구적 페미니스트였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이 지난 18일(현지시간) 워싱턴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미국 연방 대법원
미국 진보 진영의 아이콘이자 선구적 페미니스트였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이 지난 18일(현지시간) 워싱턴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미국 연방 대법원

 

지난 몇 년 동안 그랬던 것 같다. SNS에 긴즈버그 대법관이 입원했다는 소식이 올라올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치료를 잘 마치고 복귀했다는 소식이 올라올 때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퇴원 소식과 함께 얼마 되지 않아 80대 후반 할머니의 아령을 번쩍번쩍 들고 플랭크를 버티는 모습이 늘 보도되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태평양 건너의 작은 체구 할머니의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40대 후반의 지친 ”노구“의 피곤함과 무력함에 불평하던 나의 모습을 반성하곤 했다. 지난 주말 오전 SNS를 여는 순간, 화면 가득 그의 사진이 뜨고 날짜가 크게 찍혀있었다. 잠이 덜 깬 상태였지만 직감했다. 결국 가셨구나, 이번엔 영원히 가셨구나. 존재 자체만으로도 큰 힘이었던 마음속의 큰 기둥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그는 일생 전반에 걸쳐 미국 사회의 성평등과 소수자의 인권보호를 위해 싸웠던 선구자였다. 긴즈버그의 감동적인 스토리는 이미 많은 언론에 보도된 바 있고, 다큐멘터리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는 1954년 미 코넬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56년 500명의 입학생 중 9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하버드 법대에 입학하였다. (당시는 하버드 법대 학장이 ”남자 자리를 차지한“ 것에 대해 여학생들을 나무랐던 시절이었다) 이후 컬럼비아 법대로 편입하여 또다시 수석 졸업을 하였으나, 뉴욕의 어느 법률 사무소에서도 여성을 고용하지 않았다. 직장을 구할 수 없었던 긴즈버그는 가르치는 직업을 선택하였고, 컬럼비아 법대의 첫 번 째 종신직 여교수가 되었다. 1970년대에는 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y Union)에서 활동하며, “여성권리프로젝트(Women’s Rights Project)”를 창설하였고, 남녀임금격차 철폐, 임신 여성의 건강권과 일할 권리를 위해 줄기차게 싸웠다. 이후 1980년 미연방법원 판사 임명, 1993년 미 대법관 임명 이후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였으며 최근 미 대법원이 보수 성향으로 기울자 더더욱 자주, 명확히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차별과 맞서 싸웠던 이 모든 과정 중에 그는 병마와도 싸워야 했다. 1999년 대장암, 2009년 췌장암, 2014년 심장 스텐트 시술, 2019년 간암, 2020년 췌장암 재발로 인한 치료를 매번 견뎌냈고 불사조처럼 돌아왔다.

무엇보다 그는 법률가로서 미국 역사상 큰 업적을 남겼다. 1970년대 시민자유연맹 활동 시절에는 성차별적인 법률 개정과 임신 여성의 권리 옹호에 집중하였다. 1975년에는 아내를 잃은 남편들도 남편을 잃은 아내가 받는 동일한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변론하며, 남성들에게도 아이를 돌볼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임신한 여성에게도 실업자 혜택을 제공할 것과 여성의 재생산권리 옹호에 앞장섰다. 이 시기에 긴즈버그와 동료들은 미 대법원에 6번의 소송을 제기하여 5번의 승소를 끌어냈다.

대법관 임명 이후 긴즈버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판결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버지니아 군사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에 여학생 입학을 허가하도록 한 것이다. 판결문에서 그는 “여성은 개인의 재능과 역량에 따라 사회에 참여하고 이바지하는, 시민으로서의 동등한 권리가 있으며, 단지 여자만의 이유로 이 권리를 부인할 수 없다“고 설파하였다. 1999년에는 장애인들을 지역사회에서 분리하여 보호시설에서 생활하도록 하는 것은 차별이라고 판결하였으며, 2007년에는 타이어회사에 근무했던 여성이 남녀임금격차에 반대하여 승소한 것을 대법원이 뒤집은 것에 대해 강력한 반대의견을 표명하였다. 2015년에는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 2016년 낙태 시술을 제한하는 텍사스주의 법안을 폐지하는 판결에도 일조했다.

긴즈버그 대법관이 1993년 자신을 새 대법관으로 지명한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백악관에서 소감을 발표하는 모습. ⓒ워싱턴국립공문서관
긴즈버그 대법관이 1993년 자신을 새 대법관으로 지명한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백악관에서 소감을 발표하는 모습. ⓒ워싱턴국립공문서관

 

긴즈버그는 판결을 통해서 평등하고 차별없는 사회로 한 걸음 더 미국을 이끌었지만, 삶의 궤적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남겼다. 무엇보다 여성에게 모든 기회가 차단되었던 시절에 긴즈버그에게 길을 열어준 남성들이 있었으며, 본인도 이들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남편 마틴 긴즈버그(Martin D. Ginsburg)는 스스로도 뛰어난 변호사였지만, 육아와 가사를 나누어 맡으며, 긴즈버그가 사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평생 지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18살 어린 나이에 남편과의 만남을 회고하며 긴즈버그는 “나에게 뇌가 있다는 것을 처음 인정해 준 남자”라고 소개했으며, “여성의 일은 집에서나 일터에서나 남성의 일 만큼이나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그 시절에 이미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1980년 지미 카터 대통령은 긴즈버그를 연방판사에 임명하며, “남성들로 가득찬 연방 법원은 위대한 미국이 지향하는 바가 아니다“라고 개탄했다. 1996년 클린턴 대통령은 그를 임명하면서, ”가지지 못한 자들, 이 사회의 아웃사이더들, 그리고 여성 인권을 위해 품은 가치를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라고 소개하였다. 대법관 임명을 위한 상원의원회 청문회에서 공화당 남성의원들의 질문이 이어질 때, 조 바이든(Joe Biden)과 에드워드 케네디(Edward Kennedy) 등의 민주당 남성 상원의원들은 맨 앞줄을 지키고 앉아 긴즈버그를 지지해 주었다. 생전에 이 여성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형제들이여, 우리의 목을 밟고 있는 그 발을 치우라.” 이들은 그녀가 전진하기 위해서 발을 치워준 남성들이다.

긴즈버그는 반대 의견자와 소통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보수적 정치 성향의 안토닌 스칼리아(Antonin Scalia) 대법관과 긴즈버그의 우정은 훗날 오페라로 만들어질 만큼 유명했다. 정치적 성향은 완전히 달랐지만, 긴즈버그와 스칼리아는 부부 동반으로 오페라 즐겼고, 토크쇼에 출연하여 서로에 대해 농담을 했다. 스칼리아의 장례식 추모사에서 긴즈버그는 버지니아 군사학교 판결문 발표 직전, 스칼리아가 던져준 반대의견을 검토하는 작업으로 인해 주말을 망쳤지만, 덕분에 자신의 의견이 얼마나 정교해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 감사했다. 생전 스칼리아 대법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생각을 공격하는 것이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때로는 매우 훌륭한 사람들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문장은 긴즈버그를 지칭한 농담). 이 두 사람의 우정은 아무리 의견이 달라도 토론은 얼마든지 우아할 수 있으며, 충분히 “베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건강관리를 위해 플랭크를 하고 있는 긴즈버그. 그는 건강 관리를 위해 20년 간 꾸준히 근력운동을 했다. 사진=유튜브 캡쳐 
플랭크를 하는 긴즈버그. 진보를 대표했던 긴즈버그는 암 투병 중에도 건강을 철저하게 관리하며 은퇴를 미뤄왔다. 대법관 구성이 보수 5대 진보 4로 나뉘어 자신이 빠지면 대법원의 보수 성향이 짙어질 것을 우려해서다. 사진=유튜브 캡쳐 

 

긴즈버그는 8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에게도 사랑받았다. 당시 법대생이었던 샤나 니즈닉(Shana Knizhnik)은 2013년에 미국의 투표권리법(Voting Rights Act) 제4조 위헌 판결에 감동받아 ‘노토리어스 R.B.G.(Notorious R.B.G)’라는 블로그를 개설했다. 이 이름은 래퍼 ‘노토리어스 B.I.G(Notorious B.I.G.)’에서 따온 것으로, 성평등과 인종차별에 맞서 “악명높은” 반대의견을 내는 긴즈버그의 모습에 열광하여 붙인 것이다. 뉴욕 브루클린 출생, 판결의 내용에 따라 바뀌는 판사복의 레이스, 그리고 왕관을 쓴 긴즈버그는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긴즈버그의 심볼은 티셔츠, 토트백에 새겨져서 불티나게 팔렸고,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팔에 문신으로 새겼으며, 여자아이들은 할러윈에 레이스가 달린 판사복을 입었다. 그리고 그의 자서전 ‘Notorious RBG: The Life and Times of Ruth Bader Ginsburg’는 2015년도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생전 긴즈버그는 이렇게 말했다. “삶의 길을 갈 때 발자국을 남겨라. 후세의 건강과 안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갈 수 있도록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다하라.”

이즈음에서 우리 사회를 바라보며 다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여성들의 목을 밟고 있는 발을 치워줄 남성들, 젠더 챔피언들이 있는가? 우리에게는 정치적으로 가장 반대에 있는 사람들과도 우정을 나눌 만큼 소통의 능력과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가 있는가? 우리의 젊은이들은 우리가 주장하는 가치에 열광하고, 그것을 이어가고자 하는가?

솔직히 모르겠다. 저렇게 위대하고도 숭고한 명제에 대해 내가, 우리 사회가, 이 나라가 얼마나 답할 수 있을런지. 그러나 긴즈버그가 나에게 물려준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실은 내가 작년 이맘때부터 운동을 시작했는데, 긴즈버그 할머니가 아령을 번쩍번쩍 들고, 이를 악물고 플랭크 자세를 버티던 모습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90세를 바라보는 이 여성은 자기가 왜 이 플랭크를 버텨야 하는지, 암과 싸우면서도 왜 대법관 자리를 버텨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오늘 새벽에도 나는 달콤한 침대의 유혹을 떨치고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헬스장으로 향했다. 적어도 나에게 일어난 이 변화는 그가 준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도 버텨낼 것이다, 인생의 모든 굴곡을. 플랭크를 버텨냈고, 암을 버텨냈고, 차별을 버텨냈고, 궁극적으로는 그 차별을 변화시켰던 이 여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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