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원의 당신 곁에서] 공정성의 덫에 빠진 대한민국
[김정희원의 당신 곁에서] 공정성의 덫에 빠진 대한민국
  •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 승인 2020.09.20 17:27
  • 수정 2020-09-20 1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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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의 한 남녀공학 고등학교에서 바나나와 콘돔 등을 사용해 성교육하려다 학부모 항의로 취소됐다. 사진은 기사와 관계 없음. ⓒ뉴시스
애초에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해 그 이후에도 불균등하게 누적되는 어려움을 겪어온 학생들과 청년들을 오직 표준화된 시험 하나만으로 재단하고 배제할 수 있을까. 대학 입시 및 채용 시험 성적이 온전히 내 실력과 재능 덕분이라는 믿음은 우리 사회의 경쟁과 분열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여성신문·뉴시스

 

“1등부터 100등까지, 정확하게 줄 세워야죠.”

그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실력에 비례해서 정확하게 대가를 지급하는 것’이 ‘공정’이라는 한 강남 엄마의 목소리는 요즘 한국 사회 곳곳에서 들리는 것 같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는 “중요한 진단을 받아야 할 때 어떤 의사에게 진료받고 싶은가”를 질문으로 제시한 후 첫번째 선택지로 “매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창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를 내놓았다. (그들의 논리로는 이 선택지가 정답이다.) 이 홍보물이 큰 비판을 받자, 연구소 측은 서둘러 해당 내용을 “정당한 경쟁과 입시전형을 통해 꿈꾸던 의대에 진학한 의사”로 바꾸었지만 결국 핵심을 관통하는 논리는 대동소이하다. 서열과 스펙을 따져 순위권에 들지 못한 나머지들은 의사가 될 실력도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기회의 통로 자체를 없애버리자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최근 특정 집단들이 ‘공정’을 내세워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담론공세를 펼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득권과 스펙에 근거한 각자도생의논리로 한국 사회가 오랜 시간 교착 상태에 빠질까 두렵다.

원격 교육 이후 커진 학습 격차
부유층 학생들에게 유리해져

동일한 자격시험만이 유일하게 공정한 절차이고, 그 시험의 성적순에 따라 보상을 지급받는 것이 가장 공정한 결과라는 믿음은 날이 갈수록 적나라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유난히 공정성 담론이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똑같은 시험 문제로 모두를 공평하게 줄 세울 수 있다는 주장은 (그 주장이 옳다고 치더라도), 우리가 아무런 구조적 제약도 사회경제적 조건의 차이도 없는 진공관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하다.

예컨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학교 수업이 비대면으로 전환되면서 학생들 사이의 학업 성취도 격차가 커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난 7월 교육부에서 5만명이 넘는 초중고 교사들에게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교사들은 원격 교육 이후 학습 격차가 ‘매우 커졌다(32.7%)’ 혹은 ‘커졌다(46.3%)’고 답했다. 약 80%의 교사들이 격차가 증가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학교 수업이 비대면으로 전환된 상황은 대다수의 부유층 학생들에게 오히려 유리하다. 등하교 시간은 물론 학교에 ‘매여 있는’ 시간이 없어져, 사교육을 집중적으로 활용할 수 있고 분야별 유명 강사와 선행학습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반면 다른 학습 자원이 별로 없어 학교에서의 상호작용을 통해 모르는 부분을 채워나갔던 학생이 지난 학기 기말 시험을 망쳤다면, 그것은 그 학생의 노력이 부족해서일까? 일을 쉴 수도 없고 개인 과외 교사를 고용할 수도 없는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면 그 아이의 온라인 수업은 어땠을까?

애초에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해 그 이후에도 불균등하게 누적되는 어려움을 겪어온 학생들과 청년들을 오직 표준화된 시험 하나만으로 재단하고 배제할 수 있을까. 대학 입시 및 채용 시험 성적이 온전히 내 실력과 재능 덕분이라는 믿음은 우리 사회의 경쟁과 분열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모두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당신이 평생 애썼다는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핵심은 노력의 양, 질, 그리고 효과 자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 누릴 수 있었던 경제적, 인적 자원과 상징적, 문화적 자본의 역할을 고려한다면 노력의 기반 자체가 불평등하게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불평등한 기반을 단기간에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지역 인재 채용과 같은 수정 조치들이 부분적으로 도입된다. ‘공정성’을 앞세우는 이들은 이런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조차 ‘불공정’하다며 격렬하게 비난한다. 하지만 여기서 ‘공정성’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그들이 말하는 절차적 공정성은
기계적이고 맥락 없는 서열화

한국 사회의 공정성 담론은 수년 째 제자리걸음을 하는 수준을 넘어 점차 악화되고 있다. 담론 형성 과정에서 의미의 왜곡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지만, 그 과정과 결과에 따라 사회에 미치는 파장은 크게 달라진다. 오해와 갈등이 풍요로운 논의와 상호 이해를 촉진할 수도 있고, 반대로 조직적으로 의미를 왜곡하고 특정 의견을 부각함으로써 열린 대화를 아예 차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탠리 디츠(Stanley Deetz)는 이처럼 특정 집단(주로 기득권 집단)에 의해 의미의 체계적 왜곡이 일어나는 현상을 담론적 폐쇄(discursive closure)라고 정의했다. 한국의 공정성 담론은 다양한 관점의 대화 및 풍부한 논의를 차단하고, 매 사안마다 같은 방식으로 (즉, 불공정의 논리로) 논의를 종결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폐쇄 담론이다.

첫째, 공정성은 ‘객관적 당위’로 제시되며, 그 가치가 각 사안별로 어떻게 운용되거나 실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않는다. 둘째, 해당 집단의 주장은 사실 그들의 이해관계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정성이라는 가치로 포장되어 이해 관계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더 나아가 ‘가치중립적이고 옳은’ 것으로 제시된다. 셋째, 공정성 담론은 다른 이들이 논의에 참여하거나, 공공성 혹은 재분배와 같은 관련된 핵심사안에 대해 논하는 것을 지연시키거나 차단한다. 이 같은 담론 폐쇄는 특정 집단에 의해 선제적이고 조직적으로 행해지는데 (미디어의 적극적 활용, 서명 운동 등), 상대 진영은 애초에 조직되어 있는 당사자가 없거나 이미 담론적으로 수세적 위치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공정성’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토론은 전혀 진전이 없는 채로 ‘불공정하다’는 외침만 메아리처럼 반복된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거론되는 공정성은 전혀 새롭거나 진일보한 인식이나 감수성이 아니다. 젊은 세대의 공정성 감각이라고 포장될 만큼 바람직한 것도 물론 아니다. 공정성 논쟁은 철저히 이해 관계에 기반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해 관계를 은폐한다는 점에서 ‘공정성’이라는 가치 자체를 담론적 무기로 활용하는 기득권의 전술을 그대로 반영한다. 앞서 말했듯이 공정성의 의미는 체계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그들이 말하는 절차적 공정성은 기계적이고 맥락 없는 서열화다. 그리고 그 효과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흡사 신분제 논리와 비슷하다. 사회 변화, 계층 이동, 부의 재분배를 동시에 거부하기 때문이다. 공정성이라는 단어는 오랜 시간 오염되어 왔고, 이제 그 오염된 물을 빼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해 당사자들은 ‘공정 대 불공정’의 가짜 전선을 형성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주체들의 입장을 고려해 진정한 대화와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

눈앞의 이익 때문에 남 배제하면
결과는 우리 모두에게 돌아올 것

사실 근미래조차 불확실한 한국 사회에서 내가 지금 가진 것을 잃고 싶지 않은 그 불안감이 무엇인지 심정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사회적 안전망은 취약하고, 취업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극심한데, 설상가상으로 재난 상황 속에서 불확실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열심히 일해도 보상이 확실하지 않고 이미 보상의 질 자체가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흔히 말하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도 전반적인 삶의 질이 개선된다는 보장은 없다. 청년들이 자리 잡고 가족을 꾸리기도, 아이를 낳아 키우기도, 안정적으로 미래를 구상하기도 여의치 않은 사회다. 그러니 일단 눈앞에 놓인 밥그릇부터 챙겨야 하고, 혹시나 내 밥그릇에 손댈 지도 모르는 이들을 내쳐야 하기 때문에, 결국 끝없는 노력과 무한 경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에게 해방적 비전은 불가능할까? 경쟁과 차별로 타인을 낙오시키는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지금은 마치 뭉쳐있는 것처럼 보여도,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당장 나부터 살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눈앞의 이익 때문에 남을 배제한 결과는 우리 모두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누구에게든 위기와 충격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도 직시하고 있지 않은가? 나에게 위기가 찾아왔을 때, 나 역시 똑같은 줄 세우기 논리로 밀려날 수 있지 않을까? 당신 없이는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감각,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오랫동안 우리를 속박해 온 능력주의 모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새로운 가치들을 탐색하자. 우리 모두에게 경제적, 사회구조적, 그리고 정서적 측면에서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 많이 이야기하자. 연대와 공존의 실천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를 만들자. 불평등 해소와 부의 재분배를 적극적으로 요구하자. 이제 ‘공정’이 아니라 ‘정의’를 논해야 할 때다.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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