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jpg

30년이 지난 후에도 젊은 시절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

까. 아니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전 인생을 지배할 수 있을까.

윤정모씨의 장편소설 〈그들의 오후〉는 애절한 사랑이야기다. 작가

윤정모(53)씨와 사랑 이야기는 언뜻 연결이 잘 안될는지 모른다. 그러

나 아무리 사랑 이야기를 썼어도 작가 특유의 사회의식, 여성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가장 자유로운 형식으로

작가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 사법고시에 합격, 판사를 거쳐 변호사가 되고

여성단체의 추천으로 여성부 장관이 되는 서연, 부모 없이 자라며 중

학교 때 서연이를 처음 만난 후 운명적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는 기환.

소설은 그들의 유년, 중년 후반에 걸친 질기디 질긴 인연과 그리

움에 관한 이야기.

서연은 단 하나 혈육이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기환과 첫관계를 맺

고 대학에 진학하고는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젊은 나이, 가진 것 없는

그들 생활은 함께 하는 즐거움 보다는 각박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서로

에게 소모적인 관계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자기밖에 모르고 성공만을

바라보고 일상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서연의 생활은 기환의 학업

포기, 막노동꾼으로의 변신을 딛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갖

은 방법으로 서연을 뒷바라지 하던 기환은 자신의 애틋한 사랑을 몰라

주는 서연의 매몰찬 성격과 충돌하고 헤어진다.

방탕한 생활을 하다 자포자기식으로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까지

하게된 기환은 때늦게 후회하고 그와도 이혼한다. 그후로도 서연은 일

과 관련해 기환을 만나려 하지만 기환은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만남이

아니면 거절한다. 어느덧 중년이 된 그들. 기환은 여전히 첫사랑 서연

을 잊지못해 강화도에 통나무 집을 서연이 찾아주기만을 기다린다. 여

성부 장관이었던 서연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에 대한 발언으로 장

관직에서 해임되고 자신을 추적하는 박기자를 피해 기환에게 찾아간

다.

강화도 갈대와 노을을 배경으로 30년만에 해후한 두사람의 운명적 사

랑을 방해하는 것은 그들 개인의 이상 차이도 엇갈린 인연도 아니다.

뒤늦게 밝혀지는 서연의 아버지는 납북한 북한 고위간부로 서연이 장

관직에서 전격 해임되는 것도 이같은 저간의 사정 때문이었다.

“사회에서 신뢰받던 여성들이 정치권에서 추락하던 그때부터 내 머릿

속엔 ‘서연’이라는 여자 주인공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어쨌든 받기만 하면서 고마운 줄 모르고 주기만 하면서 늘 자신의 부

족함을 꾸짓는 기환의 관계에서 서연은 출세지향적이고 이기적인 여성

으로 비칠지 모른다. 하지만 작가의 말대로 기환 역시 ‘그 방식은 거

의 자기 위주이며 자신을 위해 상대를 구할 뿐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

랑해주기 위해 자신을 불태우는 남자’는 아니다.

원천적으로 남을 사랑할 마음을 봉쇄당한 서연과 자기애의 투사인 기

환의 사랑 이야기는 어떤 이유로든 순수한 사랑을 방해받는 이 시대

사랑의 현주소일는지 모른다.

〈최이 부자 기자〉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