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로 청소년 속여 성관계 동의하게 했다면…대법 “위계 성폭력 맞다”
거짓말로 청소년 속여 성관계 동의하게 했다면…대법 “위계 성폭력 맞다”
  • 진혜민 기자
  • 승인 2020.08.29 14:38
  • 수정 2020-08-29 1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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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계 자체를 속이는 경우만 위계에 의한 간음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기존 대법원 판례 바꾼 것…
‘위계’ 의미 보다 넓게 해석, 처벌 범위 확대 가능성도
김명수 대법원장이 2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공판에서 선고를 내리고 있다. ⓒ대법원
김명수 대법원장이 2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공판에서 선고를 내리고 있다. ⓒ대법원

아동·청소년을 속여 성관계에 동의하게 만들었다면 ‘위계에 의한 간음죄’로 처벌할 수 있다고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했다. 이는 성관계 자체를 속이는 경우만 위계에 의한 간음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기존 대법원 판례를 바꾼 것이다. ‘위계’의 의미를 보다 넓게 해석해 아동·청소년 성폭력 처벌의 범위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 27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상 위계에 의한 간음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환송했다.

공소사실에 의하면 A씨는 스마트폰 랜덤채팅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14세 피해자와 접촉했다. A씨는 실제로는 36세였지만 자신을 ‘고등학교 2학년 김OO’이라고 속이고 온라인으로 교제했다. 그러던 중 A씨는 ‘사실은 나를 좋아해서 스토킹하는 여자가 있는데 집착을 해서 너무 힘들다, 스토킹하는 여자를 떼어내려면 나의 선배와 성관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는 A씨와 헤어지는 게 두려워 성관계를 하겠다고 승낙했고, 이후 A씨는 마치 자신이 ‘김OO의 선배’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피해자와 성관계를 했다.

대법원은 “2001년 위계란 행위자가 간음의 목적으로 상대방에게 오인·착각·부지를 일으키고 상대방의 그러한 심적 상태를 이용해 간음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면서, 오인·착각·부지란 ‘간음행위 자체’에 대한 것으로 제한된다”는 판단을 했다. 위계에 의한 간음죄는 치료나 종교의식을 빙자하는 등 거짓말을 해 피해자가 강간을 당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거나 착오하게 해 성관계한 경우에만 처벌돼왔다.

원심은 이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스토킹하는 여자를 떼어내려면 김OO의 선배와 성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말은 성관계 자체에 대한 거짓말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위계’로 평가할 수 없다고 봤다.

그러나 대법원은 기존 입장을 이번에 달리했다. 대법원은 아동·청소년은 특별히 보호돼야 한다면서 “행위자가 간음의 목적으로 피해자에게 오인·착각·부지를 일으키고 피해자의 그러한 심적 상태를 이용해 간음의 목적을 달성했다면 위계와 간음행위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고, 따라서 위계에 의한 간음죄가 성립한다”고 판결했다. 성관계 자체뿐만 아니라 성관계를 이끄는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오인·착각·부지를 일으켜 성관계까지 이어졌다면 위계에 의한 간음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아동·청소년이 설령 외관상 성관계에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기망이나 왜곡된 신뢰관계에 의한 것이라면 온전한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다만 행위자의 위계적 언동이 존재했다는 사정만으로 위계에 의한 간음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고, 위계적 언동의 내용 중에 피해자가 성관계를 결심하게 된 중요한 동기를 이룰 만한 사정이 포함돼있어야 한다”고 봤다.

A씨 사건에 대해서는 피해자가 A씨가 설정한 허구 상황 속에서 자극적인 도발과 부탁에 시달렸고, A씨 말에 속아 성관계를 결심했으므로 이를 피해자의 자발적이고 진지한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라고 볼 수 없다고 대법원은 판결했다.

대법원은 “위계에 의한 간음죄 피해자들의 성적 자기결정 능력은 나이, 성장과정, 환경, 지능 내지 정신기능 장애의 정도 등에 따라 개인별로 차이가 있다”며 “간음행위와 인과관계가 있는 위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범행 상황에 놓인 피해자의 입장과 관점이 충분히 고려돼야 하고, 일반적·평균적 판단능력을 갖춘 성인 또는 충분한 보호와 교육을 받은 또래의 시각에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번 판결에는 대법관 전원의 의견이 일치했다. 

민유숙·노정희 대법관은 보충 의견을 통해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착취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명시한 뒤 “이들은 폭행·협박이나 위계·위력이 없더라도 어쩔 수 없이 성행위에 응하는 경우가 있고, 그 결과 자신을 착취하고 학대하며 해를 끼치는 성행위의 대상이 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성행위에 동의한 듯이 보이더라도 착취적이고 학대적인 성적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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