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점동(박에스더), 여자의사 120년] ①

김점동 사진=이화역사관 소장 자료
김점동은 해외 의대에서 교육을 마치고 귀국해 환자를 돌본 첫 서양의학 의사다. 사진=이화역사관 소장 자료

 

2020년은 1900년 김점동(金點童: Ester Kim Pak)이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환자를 돌보는 한국인 첫 의사가 된지 120주년 되는 해다. 또한 교육권, 참정권, 노동권을 주창했던 최초의 한국여성인권선언을 기리는 한국 여성의 날, ‘여권통문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정하여 최초로 기념하는 해이기도 하다. 올해부터 ‘양성평등주간’도 시기를 옮겨 매년 9월 1일부터 일주일간 양성평등을 염원하며 펼쳐진다. 진정한 ‘한국 여성의 날’이며 주간이다. 국회에서는 9월 1일 제1회 ‘여권통문의 날’ 제정을 기념하고 축하하며, 교육권을 실천한 최초의 의사, 김점동 한국 의사 120년을 기리는 행사가 진행된다.

필자와 필자 어머니, 이모도 이 땅의 딸로, 여의사의 삶을 살았다. 자매뿐인 엄마와 이모는 1940년대 초반, 고려대 의대 전신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생으로 어머니 졸업생 번호는 191호다. 어머니(5회 졸업)와 이모(3회 졸업)에 대한 필자의 사랑과 존경, 필사적인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우리나라 여의사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이 글을 연다.

여성의 직업 중 가장 전문직 직업 중 하나이며 존경받아야 마땅한 직업이었으나 여의사 삶의 현실은 열악했고 지금도 이 직역에서조차 성평등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1979년 의대를 졸업한 필자 시대에도 실력과 성적이 남성보다 훨씬 뛰어나도 인턴 레지던트에 진입할 때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모교의 전공의에 탈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한국 여의사의 역사는 근대화 이후 여성 사회진출에서 대단한 역사성을 가진다. 자유롭게, 비교적 가장 존중을 받으며 전문직으로 사는데 이상적인 전문직이었다. 또한 한국 여의사의 역사에서 비롯되어 여성 과학자의 역사로 분화되며 많은 과학 분야 여성 약진이 진행되고 있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한국여자의사회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한국여자의사회

 

최초의 의사 김점동(박에스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의사로 알려진 서재필은 쑨원과 같은 의사가 되려고 미국 콜롬비아 대학교 의과대학(현 조 지 워싱톤 의대)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해가 1892년이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00년, 김점동은 박에스더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첫 여의사가 되어 귀국한다. 미국식으로 남편 박여선의 성을 따르고 에스더라고 이름을 새로 얻은 것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한국 이름 김점동으로 부르기로 한다. 실상 서재필 선생은 병리학자이고 한국에서의 활동은 독립신문 발행, 외교관, 중추원 고문 등의 국가 자문관 활동이었으므로 우리나라 최초로 환자를 돌보는 첫 서양의학 의사는 김점동이 최초 의사자격증 있는 의사다. 1899년 김익남이 한국 최초로 일본에서 근대의학을 공부한 의사로, 1899년 도쿄 자혜의원의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자혜의원 당직의사로 근무하다가 일본에서 환자를 볼 의사는 없었으므로 의사자격증 시험을 보지 않고 1900년 8월 2일 귀국하여 의학교 교관으로 일한 바 있다. 결국 환자를 돌보는 의사로 서양의 4년제 의대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김점동이 첫 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의사가 되자 바로 귀국하여 그녀 삶 모두를 바쳐 환자 진료와 보건교육에 온 힘을 다했고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 당시에는 불치병이던 폐결핵을 얻어 사망하였다. 1900년 첫 의사 김점동 이후, 대한민국 전체 의사는 2020년 현재 129,334명, 여의사 34,316명으로 26.5%에 달한다(2020년 초, 국가고시 합격자까지 포함한 숫자.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통계, 보건복지부의 통계는 아직 2018년까지의 숫자만이 공식발표됐다). 

132년 전 세워진 우리나라 첫 여성 병원 ‘보구여관’.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
132년 전 세워진 우리나라 첫 여성 병원 ‘보구여관’.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
이화여대 부속병원의 전신인 ‘보구여관’은 현재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 위치한 이화여대 의과대학과 이대서울병원​​​​​​​<strong></strong> 옆에 복원돼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
이화여대 부속병원의 전신인 ‘보구여관’은 현재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 위치한 이화여대 의과대학과 이대서울병원 옆에 복원돼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

 

제1회 여권통문의 날과 김점동

독자들께서는 언제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인 ‘여권통문’을 생애 최초로 접하셨는가?

122년 전, 1898년 9월 1일, 북촌의 양반 여성들이 주동하여 이소사 김소사의 이름으로 ‘여학교 설시 통문(女學校設始通文)’ 이른바 ‘여권통문(女權通文)’, 즉, 여성권리를 명시한 문서를 발표했다. 당시 뜻을 같이한 여성들이 3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황성신문, 독립신문, 제국신문은 전한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권리 선언으로 근대적 여권운동의 시작이며 세계여성의 날이 촉발된 1908년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보다 10년이나 앞서는 역사적 사건이다. 필자는 2012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여권통문을 접한 그 날의 감동은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었다. 동시에, 1971년 처음 논문으로 세상에 소개되었는데 그 역사적 사실을 배우거나 접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 후 훌륭하신 여성 선각자들께 대한 감사와 존경심을 바탕으로 한 여성사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며 본격적 탐구를 이어갔다. 한편으로는 국립여성사박물관 건립과 여권통문의 의의를 지속적으로 깊이 기리며 여권통문의 날 제정에도 적극 관여하게 되었다. 전 세계 60여개국 이상에 이미 있는 여성 박물관들에 대한 부러움과 번듯한 여성사 박물관이 아직도 없음에 부끄러움을 동시에 지니게 되었다. 웅녀의 단군신화 이래 우리나라 발전역사는 5,000년 세월, 헌신과 희생으로 점철된 훌륭한 어머니들과 언니, 누이들인 여성들 역사이기도 하다. 국립여성사박물관을 세우는 일은 이 시대 남녀 모두의 역사적 사명이다. 2013년 5월 길정우 의원의 국립여성사박물관 설립에 관한 법 제안이 여성발전기본법에 담겨 동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래 지속적으로 국립여성사박물관 건립을 위한 운동이 지속되고 있다. 

여권통문이 실린 황성일보 ⓒ국립여성사전시관
여권통문이 실린 황성일보 ⓒ국립여성사전시관

 

여권통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여성인권선언서다. ‘여권통문(女權通文)’ 여성인권선언문에는 명시적으로 ‘권리’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교육권, 노동권(경제활동 참여권, 직업권), 정치참여권(참정권, 정치권) 등 크게 3가지 권리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 특히 남녀평등권으로서 교육권을 강조한다. 남녀동등권의 관점에서 여성억압과 성 역할 문제를 제기하고, 여성 교육을 통해 능력을 키워 남성과 동등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사회에 참여하며, 부부 사이에도 여성이 남성에게 통제받지 않고 존중받을 것을 주장한 여성권리선언이다. 세 가지 권리 중에서도 교육받을 권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아 고종에게 관립여학교 설치를 상소도 하며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처음 주장은 북촌의 양반부인들에서 시작하였으나, 일반서민층 부녀와 기생들도 참여하였고, 남성들도 가담하였다. 그 결실이 1899년 한국인 최초의 사립여학교인 ‘순성여학교’였다. 또한 여권통문 발표 이후 여자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조직된 찬양회는 최초의 여성단체로 기록된다. 여권통문은 한국이 근대화를 시작하며 역사상 최초로 여성들 스스로가 권리를 주장했다는 점에 역사적 의미가 크다. 또 단순한 주장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여학교(순성여학교)를 설치한 그 실천력에 더 높은 평가를 할 수 있다. 교장은 여권통문 발표시 김소사인 김양현당이다. 순성여학교는 초등과정 학교로서 서울의 느릿골(지금의 연지동으로 추정)에서 30명 정원으로 개교했다. 그러나 1903년 김양현당 사망 후 재정 등 여러 제약으로 안타깝게 소멸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여권통문 발표에서 시작된 여권운동 맥은 면면히 이어지며 다양한 형태로 분출되었다. 때로는 여성교육운동, 농촌운동, 항일투쟁,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해방 후 여성투표권, 평등교육권 등이 여성에게 쉽게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19세기 말부터의 여권운동 결과다. 2005년 이래 여성 대학진학률이 남성을 앞질렀지만 1970년대만 해도 여성은 남자 형제의 대학진학을 위해 자신의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이나 직업전선에서 일하여 학비를 보태는 것이 사회적 현상이었다.

‘국립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가 민간영역에서 2012년 9월 발족했고, 2013년 7월 5일 국립여성사박물관건립 발기인 대회와 이어진 2013년 9월 9일 (사단법인)역사·여성·미래가 민간에서 설립되며 여성사학회,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여권통문의 역사적 의미에 주목하여 왔다. 매년, 9월 1일 여권통문의 날을 기념하였고 2018년 여권통문의 날 120주년 되는 해에는 국회에서 120인의 대한민국 여류화가들의 ‘한국여성미술인 120인 특별전’이 열렸고, 여권통문의 날을 제정하자는 움직임의 염원을 담아 인천여성가족재단합창단, 연극모임, 여고생(인일여고, 정신여고)들의 함성이 함께 울려 퍼졌다.

여권통문이 발표된 날을 여성계를 넘어 국가 차원의 기념일로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드디어 결실을 맺어 2018년 신용현 의원 대표 발의로 매년 9월 1일을 ‘여권통문의 날’로 기념하고 여권통문의 날부터 1주간을 ‘여성인권주간’으로 정해 기념함으로써 여권 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려는 양성평등기본법 개정안 발의가 되어 2019년 10월 3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드디어 2020년부터 ‘한국여성의 날’인 ‘여권통문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기념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작은 힘을 보태며 개인적으로 무척 보람과 영광의 기억을 간직하게 되었다. 민주주의의 완성이랄 수 있는 성평등, 양성평등의 획기적 전기가 되기 바란다.

한국 여성들의 역사적인 날, 9월 1일을 앞에 두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올해 9월 1일은 ‘여권통문의 날’이 법정기념일이 되며 국가기념일로 최초로 전국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 ‘국립여성사박물관건립운동’을 최일선에서 시작한 ‘(국립)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위원회)’와 (사)역사·여성·미래, 행동하는여성연대에서는 정부행사와는 별도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국민의 전당인 국회에서 지난 8년간 운동의 결실로 이루어진 한국여성인권선언 ‘여권통문의 날’, 참된 한국여성의 날을 기념하며 동시에 한국 근대 여성교육 최초의 상징이랄 수도 있는 한국 첫(여성)의사, ‘김점동(박에스더)’ 120주년을 동시에 기념한다. 

필자: 안명옥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전 국립중앙의료원 원장, 17대 국회의원
필자: 안명옥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전 국립중앙의료원 원장, 17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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