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생각한다]
만화가들이 힘겹게 얻어낸 ‘자율규제’ 실질적으로는 무력
‘복학왕’ 연재중단 운동은 플랫폼 책임 방기하는 네이버웹툰,
자율규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만화계 향해 있어
네이버웹툰, 만화가를 창작자 아닌 개인 프리랜서 취급
유료 결제 수입·광고 수익은 플랫폼과 나누지만,
논란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작가의 몫으로 전가돼

 

19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네이버 웹툰 본사 앞에서 기본소득당 젠더정치특별위원회 외 7 단체가 '여혐왕 기안84 네이버 웹툰은 혐오장사 중단하라"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기본소득당 젠더정치특별위원회, 만화계성폭력대책위원회 등 8개 단체들이 지난 19일 경기도 성남시 네이버웹툰 본사 앞에서 기안84의 네이버웹툰 '복학왕' 연재를 중단하라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8월 초, 만화가 기안84가 그린 웹툰 ‘복학왕’이 성차별적 요소가 다분한 에피소드와 그에 대해 전혀 해명되지 않는 입장문을 내놓았다. 기안84와 ‘복학왕’을 둘러싼 독자들의 분노는 이윽고 ‘복학왕’ 연재 중단 운동으로 이어졌다.

한 원로 만화가는 이와 같은 흐름에 대해 “검열 행위”라며 분노를 표했다. 그가 이렇게 말한 데에는 1990년대 만화가들이 창작의 자유를 위해 투쟁해 온 역사가 있다. 우리나라 만화는 그 시작부터 줄곧 검열의 권력 아래 있었다. 성관계를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작품 연출에 꼭 필요한 장면들도 청소년문화에 부적절하다며 가차없이 잘려 나갔다. 1997년 청소년보호법 제정 이후에는 사전검열이 사후심의로 바뀌었다는 차이는 있으나 오히려 만화에 대한 심의는 더욱 거세졌다. 1997년 7월에는 ‘천국의 신화’를 그린 만화가 이현세가 음란 만화 제작 혐의로 검찰에 강제소환 당했다. 이에 대해 만화계는 단체를 조직해 창작-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전개해왔다.

한편, 온라인에 연재되는 만화는 비교적 심의에서 자유로웠는데 이번에는 2012년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폭력 웹툰’ 딱지를 들고 나섰다. 웹툰 검열을 감행하겠다는 방심위에 대항해 만화가들은 노컷(No Cut)운동을 전개했고, 운동은 성과를 거뒀다. 국가권력의 일방적 검열 대신 만화계 자율규제를 얻어낸 것이다.

그렇게 힘겹게 얻어낸 결실, 자율규제는 지금 실질적으로 무력하다. 기안84의 ‘복학왕’에 대한 분노가 쉽게 잦아들지 않는 건, 작가가 이미 수차례나 같은 혐오 표현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해당 원로 만화가는 ‘복학왕’에 대한 연재 중단 운동이 ‘검열’이며 ‘(만화계에 대한) 패륜적 행위’라고 언급했지만, 이 운동의 함의를 단지 국가기관에 기댄 검열 권력에의 요청으로 이해하는 건 악의적인 오역이다. 이 연재중단 운동은 플랫폼의 책임을 방기하는 네이버웹툰과 자율규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만화계로도 향해있다.

지난 8월 12일, 네이버웹툰은 ‘복학왕’ 논란과 관련해 이렇게 언급했다. “창작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고 있으나 (중략) 앞으로 다양한 사안들에 대해 작가들에게 환기하고, 작품에 대해서도 계속 긴밀하고 소통하겠다.” 여기에서 네이버웹툰이 말하는 ‘창작의 자유’는 만화 검열의 역사에서 기성 만화가들의 심금을 울리는 단어임이 틀림없지만, 이는 지금까지 만화계가 투쟁해 왔던 ‘창작의 자유’와는 완전히 다른 용어다. 여기에서 네이버웹툰은 창작의 자유를 스스로 보장할 수 있는 주체로서 등장하며, 따라서 ‘창작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말은 작품에 대한 편집권을 최소화했다는 입장 표명이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 네이버웹툰은 작품 안에서 일어난 혐오 표현에 대한 플랫폼의 책임을 가리고 작가에게 책임을 더 부과하며, 나아가 독자들에게는 피드백 반영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근거로서 ‘창작의 자유’를 차용한 것이다. 

기안84 ‘복학왕’ 논란 장면들. ©복학왕
기안84 ‘복학왕’ 논란 장면들. ©복학왕

 

지금까지 네이버웹툰은 작품 편집자의 역할과 책임을 방기해왔다. 지금 네이버웹툰에서 작가들은 네이버웹툰과 함께 작품을 일궈나가는 창작자가 아니라, 네이버웹툰이라는 상점에 자신의 만화 상품을 입점시킨 개인 프리랜서처럼 취급된다. 연재 스케줄, 차기작 기획은 물론이고 논란에 대응하고 사과하는 것 역시 작가 개인의 몫이다. 유료 결제 수입, 광고 수익 등은 플랫폼과 나누어야 하지만, 논란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작가의 몫으로 전가된다. 작가들은 스스로 성장해야 하며, 건강 관리도 자신이 알아서 해야 하고, 심지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더라도 그림을 그린다. 여기에서 편집자로서 네이버웹툰은 대체 무슨 일을 해온 걸까.

그 원로 만화가는 사실 이렇게 분노했어야 한다. 우리가 오랜 투쟁으로 쟁취한 창작의 자유를 기업이 책임 면피를 위해 가로채고 있다고, 우리가 쟁취하려 한 창작의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네이버웹툰이 왜 기안84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도록 내버려 두는지, 잇단 혐오 표현에 지친 독자들이 ‘이제 그만하라’고 요청할 때까지 대체 네이버웹툰은 뭘 했는지에 대해 화냈어야 한다. 그들이 보장한 창작의 자유 안에서, 기안84는 적어도 혐오 표현에 대해서만큼은 어떠한 성장도 이뤄내지 못했고 독자들은 같은 비판을 반복해야만 했다. 지금 창작의 자유를 오용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이 자유는 무얼 위한, 누구를 해방시키는 자유인가.

‘복학왕’을 둘러싼 독자들의 분노는 형식적인 작품 검수나 명문화된 가이드라인만으론 진화할 수 없다. 기안84의 해당 에피소드도 비단 특정한 대사나 연출의 문제가 아니라 해당 화 전반을 아우르는 문제의식의 오류였으므로, 사전 검수만으로는 수정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에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작가와 편집자, PD의 인권 교육은 물론이고 PD 인력의 확충을 통해 보다 작가와 긴밀하게 작품을 협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연재를 위해 아플 땐 쉰다는 원칙을 두고, 작가들의 원고 노동 강도를 함께 조율해야 한다.

만화계는 시장이기도 하지만 여러 사람이 생계를 해결하고 문화를 공유하는 하나의 생태계이기도 하다. 생태계를 가꿔야 할 책임은 구성원 모두에게 있다. 검열의 반대말은 방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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