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문경란 스포츠인권연구소 대표·철인3종 선수 사망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성적지상주의·엘리트 스포츠 대신
‘모두를 위한 스포츠’ 패러다임으로
국가대표 못 돼고 메달 못 따도
여성·장애인 누구나 스포츠 통해
다양한 삶의 가능성 누릴 수 있어야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여성신문 창간 30주년 기념 좌담회 ‘여성주의 저널리즘의 성과와 과제’가 열려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성신문

 

(관련기사 ▶ ① ‘인권보다 메달’ 한국 스포츠, 안 바꾸면 또 죽는다 http://www.womennews.co.kr/news/201190)

스포츠 폭력·인권침해 사건의 근원이 ‘성적지상주의’라는 지적은 그간 수없이 반복됐다. 프리스타일 모굴 스키 여자 국가대표였던 서정화 전 혁신위원은 최근 SNS에 “1등, 메달만” 중시하는 환경에서 “누가 옆에서 맞아도, 피해를 당해도, 현역 선수가 죽어도, 침묵한다”는 글을 올렸다. 최 선수의 동료 선수들도 지난 6일 기자회견에서 “경주시청팀 내 (실력과 성적을 빌미로) 폐쇄적이고 은밀하게 상습적인 폭력과 폭언이 당연시돼 있었다”고 말했다.

문 대표도 지난 20일 공대위 출범 기자회견에서 “금메달 100개보다 한 선수의 생명이 중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를 되새기며 국가를 향해 엘리트스포츠 존재 의미부터 다시 묻고자 한다”고 말했다.

“‘국민체육진흥법’은 체육 정책 목적을 ‘국위선양’으로 명시하고 있어요. 그 기조가 지금의 폐쇄적, 권위적인 스포츠 현장을 만들었죠. 우리는 엘리트 선수를 빨리 배출하는 데에만 집중했어요. 좋은 성적을 낸 선수에게 연금, 병역 면제 등 특혜를 제공하고, 동시에 (김연아, 손흥민 등) 극소수 성공사례를 강조하고 이상화했죠. 운동에 소질 있는 아이들을 찾아 공부 못해도 성적만 내면 앞날이 보장된다며 과도하게 압박했고요. 그러다 다쳐 운동을 못 하게 되면 그 애들은 갈 데가 없어요. 선수들이 맞아도 항의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체제에 편승하게 되는 이유죠. 너무나 강고한 구조예요. 파편적 개혁으론 바꿀 수 없습니다. 혁신위가 피해자 보호·지원 권고에 이어서 근본적인 체계를 바꾸라고 권고했던 까닭입니다.”

성적지상주의·엘리트 스포츠 대신
‘모두를 위한 스포츠’ 패러다임으로
국가대표 못 돼고 메달 못 따도
여성·장애인 누구나 스포츠 통해
다양한 삶의 가능성 누릴 수 있어야

- 혁신위는 이제 국가가 ‘모두를 위한 스포츠’, 스포츠 기본권을 보장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성별·연령·장애 등을 떠나 누구나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온전하게 향유하는 새로운 스포츠 문화를 추구할 시점이라고요.

“스포츠는 모든 시민의 건강과 행복과 존엄을 위한 기본권입니다. 우리가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에 주력할 때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노르웨이 같은 선진국들은 이미 ‘모두를 위한 스포츠(Sports for All)’ 개념을 도입했어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헌장에도 ‘스포츠는 인권’ 조항이 있죠. 한국도 달라져야죠.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 대신 전 국민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 클럽을 육성하고, 여기서 선수 풀을 만들자는 겁니다. 국가대표에 들지 못해도, 메달을 못 따도 누구나 다양한 삶의 가능성과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하잖아요. 국가가 그 기반을 마련해줘야죠.”

- 문체부에서 제정 추진 중인 ‘스포츠기본법’에 그런 내용을 반영하라고 권고하셨죠.

“네. 학교 체육부터 바꿔야 해요. 아이들은 스포츠를 통해 배려, 협동, 민주주의, 최선을 다해 도전하고 얻는 승리의 기쁨도, 다시 일어나 도전하는 법도 배울 수 있죠. 스포츠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민주적인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우고, 자신이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하는 기회도 얻을 수 있고요. 특히 우리나라 여학생들이 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 게 항상 안타까웠어요. 최근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여자는 체력’ 담론이 뜨고 있어서 반갑습니다. 스포츠는 여성들에게 힘을 불어넣으니까요.

예전에 여성 리더십 관련 행사에서 EY 사회공헌 담당 부회장을 만났어요. 장신의 여성이었는데 알고 보니 선수 출신이래요. ‘운동한 사람이 어떻게 그 자리에 갔냐’고 물었더니 뭘 그런 질문을 하느냐, 스포츠 경험이 업무 능력 발휘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아느냐고 하더군요. 저도 틈날 때마다 스포츠센터에 가요. 죽을 것 같던 시기에 운동을 시작했더니 스트레스도 풀리고 체력도 늘더라고요. 스포츠의 힘을 체감하고 ‘운동 전도사’가 됐어요(웃음). 또 생활스포츠에 투자하면 투자한 3배 이상의 의료보험 절감 효과가 있다는 해외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저는 지자체장들을 만나면 늘 ‘최고의 복지는 스포츠 복지’라고 말해요.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엘리트 스포츠 죽이기’다, ‘독단적’이다, ‘빨갱이’ 등 공격을 받았는데, 아닙니다. 오히려 ‘엘리트 스포츠 살리기’입니다. 혁신위 권고안이 모든 걸 해결할 순 없겠지만, 일단 국가가 ‘국위선양이나 성적지상주의가 아닌, 인권에 기반한 모두를 위한 스포츠를 조성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는 게 중요합니다. 당장 바뀌는 건 없어도 현장에 큰 경각심을 주겠죠. 국가가 진작 그렇게 했다면, 최 선수의 비극도 막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성 스포츠 지도자·임원 늘리고
리더의 성인지감수성도 높여야

- 혁신위는 스포츠지도자나 스포츠 단체 임원 중 여성 비율이 낮다고도 지적했습니다.

“여성을 스포츠 지도자로 여기지 않는 성차별이 여전히 만연하죠. 대한체육회 임원(2019년 10월 기준) 중 여성은 고작 15%, 3급 이상 고위직은 남성뿐입니다. 종목별 단체들도 임직원 중 ‘여성 0명’인 단체들이 적지 않아요. 양성평등기본법에 따라 여성 비율 40%는 돼야 하는데도요.

스포츠계 여성 리더들도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난해 조재범 사건, 스포츠 미투운동, 올해 최 선수 사건에 이르기까지 어떤 선배 여성들이 목소리를 냈나요? 후배들을 위해서도, 리더십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강력하게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데 말이죠. 성인지 감수성을 기르려는 노력도 꾸준히 해야 하고요.”

4월 17일 스포츠인권연구소 발족식 모습 ⓒ문경란 대표 제공
4월 17일 스포츠인권연구소 발족식 모습 ⓒ문경란 대표 제공
4월 17일 열린 스포츠인권연구소 발족식 모습 ⓒ문경란 대표 제공

- 2008년 인권위 상임위원 때부터 10년 넘게 스포츠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관련 활동을 이어오고 계십니다. 올해는 스포츠인권연구소를 세우셨죠. 또 어떤 일들을 하실 계획인가요?

“정부의 혁신위 권고 이행 현황을 감시하고, 스포츠 인권 담론을 만들어가려고 연구소를 만든 지 100일쯤 됐네요. 그러다 최 선수 사건이 일어났고, 뭐라도 해보려고 공대위를 만들어 기자회견에 긴급토론회에 정신없이 달려왔어요. 앞으로도 정부와 국회의 진상조사 활동을 감시하고 스포츠 개혁을 요구할 겁니다. 

스포츠 인권 분야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이들은 아직 ‘한 줌’뿐이지만, 이 한 줌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최근 전 미국 국가대표 체조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의 성폭력을 다룬 다큐멘터리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를 인상 깊게 봤어요. 용감하게 목소리를 낸 피해자들이 가장 큰 역할을 했지만, 언론, 경찰, 사법부 등 각계의 관계자들이 제 역할을 한 덕에 기록할 만한 사례로 남았죠.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서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더군요. 여성, 장애인, 노인 등 스포츠 현장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차별 없이 참여하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 고민하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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