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아용품 속 성역할 고정관념 여전
여성단체 개선 요구에도 시장 변화 더뎌
인권위, 다음 달 24일 조사 결과 발표

.2005년부터 윤정미 작가가 작업해온 연작 ‘핑크 & 블루 프로젝트 (The Pink & Blue Project)’. (왼쪽부터) 핑크 프로젝트-지원이와 지원이의 핑크색 물건들, 서울, 한국, 라이트젯 프린트, 2014 / 블루 프로젝트-경진이와 경진이의 파란색 물건들, 서울, 한국, 라이트젯 프린트, 2017.
‘분홍색은 여아, 파란색은 남아’. 차별이라는 지적이 계속돼도 시장의 변화는 더디다. 사진은 2005년부터 윤정미 작가가 작업해온 연작 ‘핑크 & 블루 프로젝트 (The Pink & Blue Project)’. (왼쪽부터) 핑크 프로젝트-지원이와 지원이의 핑크색 물건들, 서울, 한국, 라이트젯 프린트, 2014 / 블루 프로젝트-경진이와 경진이의 파란색 물건들, 서울, 한국, 라이트젯 프린트, 2017. ⓒ윤정미 작가

 

#1. 경기도 일산에 사는 김정현(41) 씨네 가족 첫째 김호(8)군은 분홍색을 좋아했다. 지난해 분홍색 야구모자를 쓰고 가족동반 모임에 갔다가 다른 아이들에게 “남자가 왜 여자색이야”라며 놀림당했다. 며칠 뒤 미술학원에 간 아이는 평소 입던 분홍색 앞치마를 팽개치고 “저는 여자가 아니니 바꿔 달라”고 했다. 요즘은 “가방 주머니 자수에 들어간 분홍색도 싫다, 검정이나 파란색으로 사달라고” 한다.

#2. 출산 후 육아휴직 중인 30대 공무원 이모 씨는 “최근 아동용품 매장에 가니 아이옷은 물론 이불, 베개, 턱받이, 손톱깎이 등 ‘육아 필수템’ 다수가 성별에 따라 분홍색 또는 파란색으로 나뉘어 있어 놀랐다. 고정관념을 깨고 ‘내 아이다운’ 취향을 기를 수 있게 하자고 부모들끼리는 말하지만, 시장의 큰 변화를 느끼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분홍색은 여아, 파란색은 남아’. 차별이라는 지적이 계속돼도 시장의 변화는 더디다. 여성단체들은 완구업체와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에 “물건의 쓰임새와 무관히 색상 등으로 성별을 구분하는 것은 아이들의 선택권을 침해하고 성역할 고정관념을 심어주니 개선해달라”고 요구해왔다. 이 문제를 조사해온 인권위가 다음 달 어떤 결론을 발표할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파랑은 남자, 분홍은 여자’ 

성별 특성도 전통도 아닌

마케팅과 사회화의 산물

(왼쪽부터) 상유와 상유의 핑크색 물건들, 뉴저지, 미국, 라이트젯 프린트, 2006 / 상유와 상유의 파란색 물건들, 뉴저지, 미국, 라이트젯 프린트, 2009 / 기숙사 방 안의 상유, 뉴욕, 미국, 라이트젯 프린트, 2015. ⓒ윤정미 작가
윤정미 작가의 모델 중 상유 씨의 선호 색상 변천사. 상유 씨는 어릴 적 분홍색을 좋아했으나, 2009년엔 분홍색이 유치해서 싫다며 파란색을 선호한다고 했다. 2015년엔 뚜렷한 선호색이 없었다. (왼쪽부터) 상유와 상유의 핑크색 물건들, 뉴저지, 미국, 라이트젯 프린트, 2006 / 상유와 상유의 파란색 물건들, 뉴저지, 미국, 라이트젯 프린트, 2009 / 기숙사 방 안의 상유, 뉴욕, 미국, 라이트젯 프린트, 2015. ⓒ윤정미 작가

‘파랑은 남자, 분홍은 여자’ 이분법은 성별에 따른 특성이 아닌 ‘기업 마케팅과 사회화의 산물’이다. 윤정미 사진작가의 ‘핑크 & 블루 프로젝트’는 이를 정확히 포착했다. 윤 작가는 분홍색을 좋아하는 여아, 파란색을 좋아하는 남아를 찾아 촬영하고, 이들이 자라며 선호하는 색상이 변화하는 모습을 다시 촬영했다. 어릴 땐 성별에 따라 좋아하는 색상이 나뉘었지만, 10대 때부터 여아 남아 모두 다양한 색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해, 각자의 개성에 따라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파랑은 남자, 분홍은 여자’ 이분법은 ‘전통’과도 무관하다. 수십 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아이들의 옷차림은 성별화로부터 좀더 자유롭고 다채로웠다.

김정아 한남대 의류학과 교수가 2018년 『한국복식』 제39호에 실은 ‘근대 한국 아동복식의 변천:1884~1945’ 논문을 보면, 조선 아이들은 여아 남아 누구나 무늬 없는 흰 무명 웃옷을 많이 입었고, 돌잔치 등 특별한 날엔 모두가 오방색 등 계열의 색동옷을 많이 입었다. 조선 말기 남아들은 분홍색, 다홍색 등 붉은색 계열의 두루마기를, 여아들은 흰색이나 붉은색 계열의 저고리를 많이 입었다. 1910년대부터 서양식 옷차림이 유행하자 남아들은 검은색, 회색, 갈색 등 어두운 계열이나 국방색의 양복을, 여아들은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나 다양한 색상의 원피스를 주로 입었다. 왕가나 귀족 가문 아이들도 다양한 색채의 옷을 입었다. 고종황제의 아들 영친왕은 다홍색, 보라색, 분홍색, 옥색, 흰색 등의 옷을 입었다(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대한제국 황실 어린이 의례복식에 관한 일고찰’, 2018)

(왼쪽부터) 고려 여아와 남아의 복식.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은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왼쪽부터) 고려 여아와 남아의 복식. 오늘날 성별 고정관념과는 다른 모습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은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조선시대 영친왕이 의례 때 입었던 옷차림. 다홍색, 보라색, 분홍색, 옥색, 흰색 등 다양한 색채의 의상이다. ⓒ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대한제국 황실 어린이 의례복식에 관한 일고찰’, 2018
조선시대 영친왕이 의례 때 입었던 옷차림. 다홍색, 보라색, 분홍색, 옥색, 흰색 등 다양한 색채의 의상이다. ⓒ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대한제국 황실 어린이 의례복식에 관한 일고찰’, 2018

 

여성단체 개선 요구 계속돼도

시장 변화는 더뎌
인권위, 다음 달 관련 조사 결과 발표

진짜 문제는 성별에 따라 물건 색상을 달리해 파는 것 자체가 아니다. 성별화가 아이들의 가능성과 자유를 제한하는 게 진짜 문제다. 여성단체들은 이 문제를 비판하고 개선하려 힘써왔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여아용 장난감은 사회적 역할이 ‘엄마’ 또는 ‘꾸미는 여성’으로 제한돼 있다”고 지적해왔다. 민우회는 지난해 5월 ‘#장난감을_바꾸자’ 캠페인을 통해 “여아는 핑크. 남아는 블루로 색상을 고정하지 말아주세요”, “가정일은 엄마만의 일이 아니니 ‘엄마놀이’ 명칭을 바꿔주세요”, “여아 남아가 골고루 가사놀이 장난감 모델이 되도록 해주세요” 등 시민들의 의견을 모았고, 이를 기초로 ‘성평등한 장난감을 위한 제안서’를 작성해 주요 완구회사 5곳에 전달했다.

한 대형마트의 여아 완구 코너. 역할놀이 장난감, 코스메틱 제품들이 눈에 띈다. ⓒ여성신문
한 대형마트의 여아 완구 코너. 여성을 엄마나 가사노동 주체로 한정한 역할놀이 장난감, 코스메틱 제품 등이 눈에 띈다. ⓒ여성신문
'탑토이(Top-Toy)'가 내놓은 성 중립적 장난감 카탈로그 ⓒTop-Toy
유럽에서는 성 중립적 장난감 제품도 속속 출시됐다. 2018년 스웨덴 장난감 시장에 출시된 '탑토이(Top-Toy)'의 성 중립적 장난감 카탈로그 ⓒTop-Toy

‘정치하는엄마들’은 지난 1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영유아용품의 성차별적인 성별 구분을 즉각 시정해달라”고 진정했다. 이들은 “제품의 기능과 무관하게 성별을 구분하는 것은 아이들이 원하는 색상을 선택할 권리를 현저히 침해”하며, “‘소꿉놀이는 엄마놀이’라는 규정은 구시대적인 ‘성역할 고정관념’을 아이들에게 강요해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은 여성의 몫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줌은 물론 아이들이 원하는 일을 선택할 자유를 침해하므로 인권침해”라고 지적했다. 인권위는 지난 4개월간 이 문제를 조사했고 지난 20일 전원위원회에서 의결할 예정이었으나,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사안이므로 더 면밀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며 오는 8월 24일 열릴 전원위원회에서 최종 의결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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