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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푹 젖은 스펀지 같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피곤에 꾹꾹 눌려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물이 뚝뚝 흐를 것 같은 스펀지. 새벽 3시가 훌쩍 넘어선 시간, 마감이 임박한 대본을 대충 손보고 콜택시를 기다리는데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젊은 나이에 일, 스트레스, 그리고 매출에 치여…. (참고로 나는 홈쇼핑작가다.) 개인생활은 하나도 없고 매일 새벽 촬영에 편집에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아무리 힘들어도 잘 할 자신이 있다고 그렇게 의기 양양하던 나였건만 몸이 지치니 마음도 점차 지쳐가고 있었다. 거의 일주일 연속으로 새벽에 들어갔다가 퉁퉁 부은 만두가 되어 아침에 나오는 내 뒤통수에 대고 동생은 측은한 듯 읊조렸다.

“누나! 산업 혁명 때보다 누나 일 더 많이 해”

측은지심에서 감탄지심으로

그렇게 스스로 신세 한탄을 하며 한 10분쯤 기다렸을까. 매끄럽게 잘 빠진 콜택시가 보였다. 택시를 보는 순간 집에 갈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30분 동안 차안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스럽기 시작했다. “아! 순간 이동을 해서 집에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저 택시가 영화 ‘택시’에 나오는 택시처럼 날아서 간다면” 등의 별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면서 지친 몸을 끌어다가 택시에 쑤셔 넣었다.

짐처럼 택시 안에 툭 던져진 나를 반갑게 맞이한 것은 택시 기사 ‘아저씨’가 아니라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아줌마’였다. 택시 기사 아줌마라서 놀랍기 보다 - 아니 오히려 아줌마라서 너무 안심이 되었다 - 벌컥 측은지심이 들었다.

젊은 나도 이 시간에 이렇게 일하면 힘든데 새벽까지 운전이라, 불쌍한 아줌마. 분명 남편은 없고 아이들을 부양하며 힘들게 살 테지. 택시 타기 전부터 시작된 순간이동 상상의 연장선상에서 상상은 점점 더 해져 단칸방에서 불쌍한 아이 셋쯤이 울면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유치한 화면까지 둥실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반갑게 인사를 건넨 아줌마는 대뜸 내게 영어 책을 보여주며 해석을 해달라는 게 아닌가. 얼떨결에 떠듬떠듬 해석을 해주고 보니 택시 기사 아줌마는 지금 방송통신대를 준비하고 계시며 영어는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하고 계시단다. 그리고 나라에서 하는 컴퓨터와 고교수업을 듣고 있는데 오늘은 선생님께 칭찬을 들었다며 수줍게 웃기도 했다. 택시 일은 돈도 돈이지만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일이기에 벌써 10년 넘게 하신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자기계발은 나이와 상관없다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던 내 몸과 유치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내 머리가 순간 당황하기 시작했다. 왜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새벽 택시 기사 아줌마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한다고 단정짓고 있었을까.

장난스럽게 휘두른 뽕 망치에 맞은 듯 정신이 들면서 엉뚱한 상상은 사라지고, 축축하게 젖어 있던 스펀지 같던 몸도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었다. 택시기사 아줌마는 가는 내내 영어공부의 어려움과 앞으로 자기 꿈에 대해 수줍게 얘기했고, 나는 택시 안의 30분이 정말 짧게 느껴질 정도로 감동적으로 그 얘기를 들었다.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계단을 오르면서 스스로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내가 그 아줌마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위해 도전하고 공부할 수 있을까? 아니 40대 이후가 아니라 지금 당장! 내가 그 아줌마보다 젊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택시 기사 아줌마가 왜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한다고 단정지었을까. 혹시 난 자기 계발을 위한 직업은 20대 여성만의 전유물이라고 단정짓지는 않았는가.

다음날도 난 여전히 만두처럼 팅팅 불어 아파트를 나섰지만 마음만은 한결 밝았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에 내 젊음과 열정을 쏟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새벽에 만난 택시 기사 아줌마처럼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내 꿈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은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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