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조현병에 의한 범죄” 영장 또 기각
이례적으로 영장 기각 사유 상세히 밝혀
피해자 가족 “재발 막으려면 지지·연대 필요”
‘강남역 사건’ 때도 ‘여성혐오’ 아니라던 법원
SNS선 “여성혐오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서울역 여성 폭행 혐의를 받는 이모씨가 지난 4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받은 뒤 철도경찰 호송 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여성신문·뉴시스
서울역 여성 폭행 혐의를 받는 이모씨가 지난 4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받은 뒤 철도경찰 호송 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여성신문·뉴시스

 

법원이 이른바 ‘서울역 묻지마 폭행’ 사건의 피의자인 이모(32)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또 기각하며 “여성혐오 범죄가 아닌 조현병에 의한 우발적 범죄”라고 못박았다. 사건 직후부터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명명하며 적극적 수사와 엄벌을 촉구한 여성들은 법원의 기각 사유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은 보이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김태균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15일 상해 등 혐의를 받는 이씨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지난 4일에 이은 두 번째 기각으로, 법원은 여성혐오에서 비롯한 무차별적 범죄가 아닌 조현병에 따른 우발적 범죄라고 판단했다.

법원이 공개한 이씨의 영장기각사유는 총 719자다. 지난 4일 첫 구속영장이 기각될 당시에도 1100자가 넘는 기각사유를 공개했다. 법원이 언론에 공개하는 영장심사결과는 통상적으로 20자~200자 내외로 이번 사건을 둘러싼 논란을 의식해 이례적으로 상세하게 공개한 것으로 보인다.

김 부장판사는 “피의자의 주거지가 일정하고 기록과 심문 결과에 의해 확인되는 사정들을 종합하여 보면, 현 단계에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면서 “현재까지 수집된 증거자료의 정도, 수사의 진행경과 및 피의자가 수사에 임하는 태도 등에 비춰 보면, 피의자가 새삼 도망하거나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어 김 부장판사는 “여성혐오에 기인한 무차별적 범죄라기보다 피의자가 평소 앓고 있던 조현병 등에 따른 우발적, 돌출적 행위로 보인다”며 “피의자는 사건 발생 후 가족들이 있는 지방으로 내려가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있고, 피의자와 그 가족들은 재범방지와 치료를 위해 충분한 기간 동안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4일 1차 구속영장 심사 당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여성혐오 범죄자는 풀어준다’는 비판이 나온 것을 고려한 조치로 보인다.

앞서 이씨는 지난달 26일 오후 1시50분께 공항철도 서울역 1층에서 일면식도 없는 여성의 어깨를 밀친 뒤 여성이 항의하자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해 상처를 입히고 도주한 혐의(상해)를 받는다. 피해 여성은 눈가가 찢어지고 한쪽 광대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여성혐오’ 논란이 일었다. 지난달 31일 SNS에서는 ‘#서울역여성혐오범죄’라는 해시태그가 쏟아졌다. 사건을 ‘#여성혐오범죄’라고 주장한 한 트위터 이용자는 “만약 피해자가 키 180cm의 남자였다면 주먹으로 맞았겠느냐”며 “묻지마 범죄라는 말은 너무 많은 것을 가린다”고 주장했다. 검거가 늦어지면서 국토부 소속 철도 경찰대가 부실하게 수사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결국 철도 경찰대는 경찰과 공조를 통해 용의자를 이씨로 특정하고, 지난 2일 자택에서 이씨를 붙잡았다.

19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부근엔 추모의 글이 적힌 포스트잇이 가득하다.abortion pill abortion pill abortion pillsumatriptan patch sumatriptan patch sumatriptan patch ⓒ이세아 기자
2016년 5월 19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 강남역 사건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글이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여성신문

 

4년 전 ‘강남역 사건’ 당시 검·경·법원 “여성혐오 아냐”

2016년 5월 17일 30대 남성 김성민은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인근에 위치한 건물 공용화장실에서 한 여성을 살해했다. 이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은 여성들에 의해 ‘여성혐오 범죄’로 명명됐다. 경찰과 검찰, 법원마저 이 사건은 “여성혐오에 기인한 것이 아닌 조현병에 의한 우발적 범죄”라고 결론냈다.

강남역 사건은 범인이 미리 흉기를 준비하고 범행 장소까지 정하고 행한 계획범죄였다. 사건이 알려지자 SNS에서는 가해자 김성민이 화장실에 숨어있다가 남성 6명을 그냥 돌려보낸 뒤 여성이 들어오자마자 살해했다는 점, 살해 동기로 “여자들이 무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는 점을 들어 ‘묻지마 범죄’가 아닌 ‘여성혐오 범죄’라고 명명하며 여성이 안전할 권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강신명 경찰청장은 “실체가 없는 망상을 혐오로 단정 짓는 것은 부적절하다”면서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정신질환자를 별도로 관리하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사실상 강남역 사건을 조현병에 의한 살인으로 규정한 것이다.

검찰도 김씨를 구속기소하며 “정신질환에 기인해 불특정 여성을 상대로 범행을 사전에 계획한 살인”으로 판단했다. 여성혐오로 인한 폭력이 아니라 정신질환으로 인해 여성에게 폭력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법원의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법원도 재판부는 정신 감정 결과 등을 기초로 “김씨가 여성을 혐오했다기보다 남성을 무서워해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고 판결문에서 밝혔다. 결국 김씨는심신미약 상태가 인정돼 검찰의 구형량인 무기징역보다 낮은 징역 3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조현병에 의한 우발적 범죄”라는 사법부의 판단은 여성혐오에서 기인한 범행동기 등이 있는데도 가해 행위를 정신질환자의 우발적인 폭력으로 규정지으면서, 성 불평등이라는 현실은 지운다는 비판은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SNS 캡쳐
SNS 캡쳐

 

피해자 가족 “참담하다” 호소

피해자 가족 측은 SNS에 법원의 판단을 비판하는 네티즌들의 게시물을 공유하면서 ”이 사건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해 달라. 의견을 나누고 분노해주고 알려주고 공유해주고 기억해달라”며 ”피해자가 스스로 상처 입으며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으려면 많은 분의 지지와 연대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SNS 상에서도 “여성혐오에 기인한 무차별적 범죄라기보다 조현병 등에 따른 우발적, 돌출적 행위”라고 판단한 법원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트위터에서는 재판부 영장기각 사유에 대해 “서울역 폭행이 여성혐오가 아니면 뭐냐”, “서울역 한복판에서 얼굴도 모르는 여자를 이유없이 폭행하는 것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냐”. “피해자가 여자가 아니었으면 그렇게 폭행했겠느냐” 등의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 성인지통계 시스템에서 공개한 대검찰청 ‘범죄분석’ 자료를 보면, 2018년 발생한 살인·강도·방화·성폭력 등 강력범죄(3만5272건) 가운데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은 2만9313건(83.1%)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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