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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에게 밥을 준 뒤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충고를 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건 상대적으로 내게 충고를 하는 사람이 많고, 충고로 인해 사람이 바뀌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리수를 둔 충고일수록 벽을 때리고 멀리 튀는 공처럼 대단한 듯하지만, 사실은 벽을 움직이지는 못한다는 판단을 했을 때, 니체의 명언이 생각났다. 자신의 내면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는.

한 동네에서 삼십여 년을 살면서 이웃들과 싸운 적 없던 나는 고양이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 앞에선 언성을 높여야 했다. 내가 손해보고 말 문제면 좋았으련만, 당장 죽을 수도 있는 생명들과 관련된 문제라 싸웠고,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이기기 위해선 상대가 언성을 높이면 나는 더 언성을 높여야 했고, 상대가 언성을 높이기 전에 미리 언성을 높여야 할 때도 있었다. 성인이 된 뒤 언성을 높이며 싸워본 적 없는 내가 이렇게 악을 쓰며 살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은 골목의 성질 고약한 할머니와 싸우고 있는데, 음대를 나온 우아한 부인이 달려와 나를 말렸다. “선생님이 대체 왜 이러세요. 제발 좀 참으세요”라던 말이 나를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그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기세를 꺾어야만 했던 나는 그 말에도 냅다 소리를 질렀다. “왜 이러냐고요? 이겨야 하는 싸움이기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이 악질 노파에게 절대 질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거라고요!” 신문에 난 내 기사를 보고 내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는 그녀에게 보이는 모습이 그처럼 추했지만, 나는 오직 속으로만 부끄러워 고개 숙였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내 집을 드나들며 충고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로부터 내가 받는 상처 또한 가장 깊었다. 마당이 넓어 고양이들이 눈에 띄지 않게 깃들어 살면 아무 일 없었겠지만, 좁디좁은 한옥에 살며 끝도 없이 들어야만 했던 진심어린 충고라니. 그들의 충고는 가난한 사람의 곳간에 쌓이는 먼지산처럼 나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할 때는 딱 두 마리의 고양이만 잡아 데리고 오기로 했다. 2012년 10월 9일에 태어난 2호 고양이, 2013년 3월 23일 같은 배에서 태어난 3호 고양이였다. 그때까지 두 녀석은 작은엄마와 아들놈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놈들을 그냥 두고 오면 골목 노인에게 독살당할 것이 뻔했고, 용케 그 인간을 피해도 안정이 보장되지 않았다. 일찌감치 아들놈에게 쫓겨나 골목을 떠돌던 나의 1호 고양이는 운명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짐이 다 빠진 썰렁한 한옥에서 나는 난민처럼 생활하며 통덫을 놓고 기다렸다. 이삿짐이 빠져나가던 소란 속에 놀라 모습을 감춘 녀석들은 며칠 째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 아들놈이 먼저 잡혔다. 통덫 문이 닫히자 패닉이 되어 날뛰다 피를 흘리는 녀석을 안정시키기 위해 천으로 덮은 뒤 옮기기 위해 들자 엄청난 무게에 허리가 꺾였다. 몇 번이나 땅에 내리치며 2백 미터 거리에 있는 이사한 집으로 옮겨놓자, 녀석은 다시 미친 듯이 날뛰다 예상대로 장롱 위 와인상자 속으로 숨었다. 실내로 들어오는 순간 녀석의 이름은 써니가 되었다. 햇볕처럼 따뜻한 기운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였다. 작은엄마를 잡는 데는 며칠이 더 걸렸다. 역시 저녁 무렵 마당으로 내려왔다 태연하게 딴청을 하고 있는 나의 등 뒤에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통덫에 들어간 녀석은 훨씬 가벼웠다. 녀석들을 잡는 것으로 나는 17년 넘게 살았던 그 작은 한옥을 완전히 떠났다. 누나인 2호 고양이는 남은 생을 마냥 달콤하게 살라는 뜻으로 하니라고 불렀다.

하니와 써니는 장롱 위에서 보름 이상 내려오지 않았다. 대체 어떤 몰골로 있을까 궁금해 멀찌감치 떨어져 올려다보면, 중성화의 표징인 두 쌍의 짝귀만 살짝 보였다. 내가 집에 없을 때와 깊이 잠든 시간에만 내려와 밥을 먹고 화장실을 쓰는, 참으로 물렁한 녀석들이었다. 밥을 주는 길냥이들이 내게 몸을 비비며 꼬리를 감고, 미리 마중 나오고, 한참을 앞서 걸으며 배웅까지 하는 것과 비교하면 한마디로 어리석은 놈들이었다.

실내에서 녀석들이 처음 입을 열었을 때 나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미성인 두 녀석은 나와 적당한 거리만 확보되면 주거니받거니 무척 많은 대화를 하곤 했다. 특히 못생긴 써니의 목소리가 귀가 번쩍 뜨일 정도로 미성이라 그때껏 숨어 사는 누리끼리한 녀석의 얼굴을 생각하면 코믹하게 느껴졌다. 그런 녀석들의 대화에 가락이 붙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이 왔다. 고양이 때문에 나를 환자 취급하는 친구들이었고, 그 중엔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자도 있었다. 한 번 오면 오래도록 놀다 가는 친구들이라 나는 미리 구석진 싱크대 앞으로 탁자를 옮겨 놓았고, 우리는 거기서 바글대며 놀고 있었다.

하니와 써니에게도 익숙한 사람들이라 녀석들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녀석은 우리가 노는 패턴을 꿰고 있었다. 마치 ‘저 인간들은 한 번 엉덩이를 내려놓으면 화장실 갈 때만 조심하면 된다’라고 믿는 것 같았다. 그러다 찔끔거리던 하니와 써니의 대화에 제대로 가락이 붙기 시작했다. 장단고조가 뚜렷한 그 가락은 끝없이 이어졌고, 친구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랐다. 어떤 친구는 “쟤들이 저러니까 조은이 버리지를 못하고 절절 매는구나!”라고 했고, 어떤 친구는 “저 노래를 빨리 녹음해서 음원을 팔아. 그럼 돈방석 위에 올라앉을 거야!”라고 했으며, 또 어떤 친구는 “세상에! 세상에!”를 연발했다. 나를 걱정한답시고 걸핏하면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던 친구의 눈도 놀라움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저녁에 시작된 노래는 내가 잠드는 순간까지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황폐한 나의 머릿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언제까지나 그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나는 평화롭게 힐링되고 있었다. 그러던 2017년의 긴 겨울 끝, 정확히는 2018년의 봄이 오기 전의 마지막 한파 때. 들개 떼로부터 가까스로 구조된 또 한 마리의 청소년 고양이가 집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네 달 동안 계속되던 하니와 써니의 노래는 완전히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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