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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 급식처에 가끔 기인들이 나타난다. 가장 끈질긴 건 동물을 싫어하다 못해 혐오해서 나쁜 짓을 하기 위해 나타나는 위인들이다. 나머지는 대체로 무관심하고, 소수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아주아주 가끔은,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울 생각에 직접 길고양이를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 또한 신기할 따름이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온갖 간식을 길고양이에게 먹인 뒤 뒤처리를 하지 않고 가는 말썽이라면 말썽을 일으킨다. 싫어하는 사람의 행동은 실로 무궁구진하고 다양하다. 어제만 해도 우리 동네 주택가 한복판 급식처에 청색 팬티를 던져놓고 간 남자가 있었다. 보자마자 나는 걷어차 버렸지만, 그다지 멀리 날아가지도 못하고 시야에 들어왔다.

안 보려고 애써도 자꾸 눈이 가는 그 팬티를 마음먹고 찬찬히 한 번 살펴보았다. 그것은 분명 고급 실크 팬티였다. 붙어 있는 상표로 봐서 국산도 아닌 듯했다. 남자들도 그처럼 호사로운 팬티를 입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고, 명품 팬티를 입을 정도의 남자가 그런 흉한 짓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 작자는 팬티를 주택가 한복판인 그곳에서 벗었을까, 아니면 으슥한 곳에서 벗어 들고 그곳으로 왔을까?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혹시 이 작자가 전에 고양이 밥그릇에다 소변을 누고 간 위인일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직교회 앞 급식처 밥그릇에 여러 차례 대변을 넣어두고 간 인간도?’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인간은 “이 세상에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며 동네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선동하는 내 연배의 독신여성이다. 그 사람에게 반려견 한 마리가 있다는 것은 두고두고 신기하다. 하긴 개를 때리는 것을 보다 못한 이웃여자가 새벽에 그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그녀를 불러내 뺨을 올려붙였다지.

사직교회 앞 급식처에 변이 세 차례 놓여 있었다. 밥그릇 안에 담겨 있는 모양새로 봐서 그것은 집에서 배설한 뒤 옮겨놓은 형태였다. 그 지독한 불쾌감을 나는 종로구캣맘협의회 회장에게 말했고, 그는 유전자 검사를 해서라도 범인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꼬리가 길면 언젠가는 발각되어 망신을 당할 거라는 내 생각에 그것은 적절한 대처 방법이 아니었다. 우선 그릇에 담긴 것을 가지고 가서 운 좋게 유전자 검사를 한다 한들 일치한다고 예상되는 자의 유전자는 또 어떻게 확보해 검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 흉측한 일은 사료그릇이 있는 지점에 도착하기도 전에 변을 떨어뜨린 상태로 발견된 뒤 끝났다.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서 옮기다 그녀의 손을 더럽힌 뒤 발등으로 떨어졌다고 짐작되는 모양새였다. 본인에게도 그 일은 치명적일 정도로 불쾌했을 것이다.

수없이 하는 말이지만, 나는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면서부터 인간에 대한 기대감을 다 버렸다. 그런데도 실망할 일은 놀랍게도 새롭게 새롭게 일어난다. 길고양이 10여 마리를 위한 하루치 사료를 한 톨도 남기지 않고 털어다 자기 집에서 기르는 진돗개에게 먹이는 사람은 애교스러울 정도이다. 십여 년 고양이 밥을 주면서 생겼던 불화, 급식처가 안정되기 까지의 고된 인간관계. 목뼈가 휘도록 수그린 고개, 수없이 급식처를 옮겨야 했던 사정은 마치 대상이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여정처럼 거칠었다.

그랬음에도 나는 요즘 동네 사람들을 통해 인간의 가치를 또 낮추고 있다. 그 중 한 사람은 전에도 말했듯, 5년 전 우리 골목에 나타나 식물을 기가 막히게 키우는 여성이다. 사람의 악한 심성을 깨우는 데 탁월한 자질이 있는 그녀로 인해 우리 동네 전체 급식소가 흔들리고 있다. 그의 선동에 호응한 마을 사람들이 길고양이를 박멸해달라는 탄원서를 구청에 제출하는 것을 보며, 악은 선보다 훨씬 잘 뭉치는 특성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고양이를 다 죽인다니 어떡하면 좋아요?”라며 눈물을 글썽이던 주민도 탄원서에 서명을 했다니, 인간의 판단력이야말로 믿을 것이 못된다. 게다가 그 사람은 탄원서에 서명한 뒤 내게 달려와 그 말을 했다. 고양이가 자기 집 화분을 한 번 넘어뜨렸기 때문에 길고양이를 없애야 한다고 서명한 여성의 딸은 고양이를 두 마리 기르고 있다. 하긴, 그녀는 길고양이를 들여 키우는 딸을 그녀는 너무도 수치스럽게 여긴다.

전에 이 동네에서 작은 가게를 하던 60대 여자가 지나가고 있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힐끗 우리 집 창을 올려다보고 가는 것으로 봐서 나라는 존재가 편하지는 않은 것도 같다. 그가 갑자기 가게를 정리해야 했을 때, 나는 마음이 안되어 필요도 없는 물건을 샀다. 박스 째 구입한 캔 사이다는 유통기한이 한달이나 지났고, 다른 것도 매 한가지였다. 가게를 정리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남편이 죽었을 때, 나는 문상도 갔다. 동네 사람이라곤 눈에 띄지 않는 썰렁한 상가에서 부인은 나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세상에, 이 사람이 복이 많아 또또 엄마 문상을 다 받네요!” 그랬던 사람마저 내 뒤통수에 대고 “고양이가 너무 많다!”는 말을 하고 있다.

아, 이런 와중에도 내가 힘들게 입양 보낸 고양이들의 사진이 연달아 날아온다. 영물로 통하는 고양이들이 내게 힘을 보태주려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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