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choks@ewha.ac.kr

그 날 따라 저녁 늦게 학교를 나섰다. 9시 뉴스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죽기 싫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세 아이를 아파트에서 떨어뜨리고 자신도 투신 자살한 비정한 한 엄마에 대한 뉴스를….

여성연합의 남인순 사무처장은 이 뉴스를 듣고 가슴이 쿵 무너져 내렸다고 표현했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통곡소리에 깜짝 놀라 차를 세웠다. 아무리 감정을 추스르려 노력했지만 터져 오르는 슬픔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아이가 어른의 소유물이냐고 엄마가 어쩌면 그렇게 비정할 수 있느냐고 탓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이를 낳아 키워본 사람은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극한적인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 곳이 그렇게 없었냐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그 엄마를 위로하고 싶다. 우리가 겨우 이런 공동체밖에 유지해오지 못한 것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은 임금님도 어쩔 수 없다”는 옛말이 있듯이 국가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국가는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을 마련하고 사회와 더불어 상담이나 정신적 지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는 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도 개인이 극한 선택을 한다면 그건 개인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IMF 이후 우리 사회에는 자살이 두 배로 늘었다고 한다. 생활고로 인해 가정이 해체되고 고귀한 생명이 사라지는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대책을 세우고 있는가.

이틀 후 ‘대안언론 모색을 위한 워크숍’을 앞두고 있던 나는 사람이 죽어 가는데 언론개혁 운운하는 내 자신이 무력해 보이기만 했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혜택을 주지 못하는 데 대한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왜 언론개혁이 반드시 필요한지에 대해 더욱 또렷한 목적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수준에서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이 사건의 구조적인 원인과 사회적인 배경, 그 개인의 삶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본 적이 없다. 그나마 월간 여성지에서 사건의 뒷이야기를 다루고 있을 뿐이다.

아직까지는 신문이 아젠다를 형성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극한에 몰린 한 엄마의 입장에서 기사를 취급한 종이신문이 없다는 점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지면이 한정돼 있는데 어떻게 그 많은 기사를 심층적으로 다룰 수 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언론의 관심사가 정말로 민초의 삶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벌써부터 차기주자의 이름들이 설왕설래한다. 정작 주목을 받고 있는 민주당 인사가 아니라 한나라당 주자들이 주요 대상이다. 이러한 논의가 일요신문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요 일간지가 구체적인 사람의 이름까지 거명하며 인터뷰 기사를 싣고 있다.

며칠 전에는 어느 도지사가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대권 도전 의사를 밝혔다는 기사가 났다. 새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벌써부터 차기 주자를 띄우기 시작하는 언론의 천박함과 경솔함이 암담할 따름이다. 언론이 막나간다고 정치인까지 이렇게 앞뒤 생각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 지사는 지난해 대권에 도전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도지사에 출마했다는 상대의 비난을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사람이 겨우 일년 전의 약속을 망각하고 그 동안 뭘 해 놓은 것이 있다고 대권 운운하는지 실망이 앞선다.

미국에서 도지사 출신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또 성공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도지사로서 도민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도지사에 당선된 것만으로 대권에 한 걸음 다가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대단한 착각이다. 이인제씨나 조순씨의 전철을 밟지 말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도정 4년을 대권을 위한 포석으로 활용하려드니 지역행사에 소방헬기를 타고 나타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국민의 삶은 척박한데 정치인은 모두 대통령병에 걸려 있다. 정치인들이 조금이라도 국민의 입장에서 정치를 생각한다면 이런 식의 자기 중심적 발언으로 국민을 실망시키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인이 이렇게 된 데에는 물론 언론의 책임이 가장 크다.

보수언론은 김대중 정권을 잃어버린 5년이라 안타까워하며 권력을 다시 찾을 날만 기다렸다.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권력이 날아가면서 이제는 잃어버린 10년이 되어버렸다.

언론은 다급한 나머지 벌써부터 한나라당 차기 주자 띄우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차기 주자가 없는 정당은 곧 와해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언론의 조급함을 부추기는 것 같다.

한나라당을 변화시키지 않은 채 차기주자만 띄우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언론의 자만이다. 진정으로 한나라당이 수권정당이 되기를 바란다면 언론은 더욱 매섭게 한나라당이 변하도록 채찍질해야 할 것이다.

현직 대통령이 취임한 지 아직 반년도 지나지 않았다. 경제는 어렵고 북핵위기로 안보가 위협을 받고 있다. 대통령 취임선서에 서명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차기 대권투쟁으로 치닫는 것은 국가나 국민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민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고 싶어하는 지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정치인이 필요하다. 그런 정치인을 골라내는 일이 바로 언론이 해야할 작업이다. 언론개혁이 가장 시급한 과제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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