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한 위계와 권력 작동하는 정치계 성폭력
‘미투’ 고발 나오기조차 어려운 열악한 환경
조직 내 성폭력 전담기구 권한·위상 강화해야

오거돈 전 부산시장(왼쪽)과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왼쪽)과 안희정 전 충남지사. ⓒ뉴시스·여성신문

최근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폭력 사건이 밝혀지며 2년 전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 사건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 현직 광역자치단체장으로 근무 중이던 두 정치인은 성폭력 사건으로 사퇴를 했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위력에 의해 성폭력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잇따른 정치계 ‘미투’에서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이고 재발방지를 위해서는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 주목 받은 안희정 성폭행 사건

안 전 지사의 성폭행 사건은 지난 2018년 3월 5일 JTBC ‘뉴스룸’에서 피해자인 현직 수행비서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안 전 지사는 2017년 7월 29일부터 2018년 2월 25일까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4회,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1회, 강제추행 5회를 저지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안 전 지사의 성폭행 사건의 쟁점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죄’ 적용 여부였다. 형법 제303조에 따르면,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은 업무·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는다. 여기서 위계란 상대방을 착오에 빠트려 정상적인 성적 의사결정을 못하게 하는 경우를 뜻한다. 위력은 폭행·협박은 물론 지위나 권력을 통해 상대방의 의사를 제압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안 전 지사는 2018년 8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1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에 대해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할 위력이 있다”면서도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문심리위원들이 피해자가 그루밍의 심리상태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지만 1심 재판부는 이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1심에서 재판부는 피해자의 저항을 중심으로 사건을 판단했다.

그러나 안 전 지사는 지난 2019년 2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 받고 법정에서 바로 구속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에서 인정되지 않은 ‘업무상 위력 행사’를 인정했다. 대법원은 지난 2019년 9월 항소심의 판단을 그대로 인용해 안 전 지사에 대한 형을 확정했다. 안 전 지사는 현재 복역 중이다.

 

지난해 9월 9일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가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이날 대법은 안 전 지사의 상고를 기각하고 징역 3년6개월의 원심을 확정했다. ⓒ뉴시스·여성신문
지난해 9월 9일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가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안 전 지사의 상고심 기각 환영 기자회견을 했다. 이날 대법은 안 전 지사의 상고를 기각하고 징역 3년6개월의 원심을 확정했다. ⓒ뉴시스·여성신문

오거돈 성추행이 남긴 정치계 숙제... 원인과 대책은

2년 전 안희정 성폭행 사건에 이어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 사건은 지난 23일 오 전 시장의 사퇴 기자회견을 통해 알려졌다. 오 전 시장은 지난 4월 초 업무 시간에 집무실에서 부산시 소속 여성 공무원을 성추행했다고 시인했다. 오 전 시장은 현재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및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한편 경찰은 지난해 10월 한 유튜브 방송을 통해 제기된 성추행 사건에 대해서도 수사에 착수했다. 이 성추행 의혹은 이번 4월에 발생한 성추행 사건과 별개의 사건으로 추정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3일 오 전 시장의 사퇴 기자회견 직후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고 엄격한 조치를 약속했다. 이에 따라 민주당은 지난 27일 윤리심판원을 열어 오거돈 전 부산시장을 제명 조치했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지난 24일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과 관련해 “민주당에서 성폭력 사건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서 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민주당이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동안 반복해서 사과를 해왔다. 하지만 사과란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사과”라고 지적했다.

남인순 최고위원은 “젠더폭력과 관련한 시스템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 점검하고 성인지감수성의 교육을 체계화해야 한다”며 “당과 국회 구조 자체에 성인지 감수성을 갖는 조직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명 조치만으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조직 내 성범죄 처리 매뉴얼이 지켜지는 것이 중요하고 이를 담당하는 조직내 기구가 권한과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무법인 덕수 박수진 변호사는 “그동안 위계·위력에 의한간음죄는 입증에 어려움이 있어 수사기관에서 법 조항 적용에 소극적인 측면이 있었다. 이 때문에 피해자의 신고도 상대적으로 적었다”며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정치권에 국한돼 발생하는 일은 아니다. 업무상 위계 관계가 형성된 곳, 가해자와 피해자의 권력 차이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고 밝혔다.

박 변호사는 “이러한 성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익명 신고가 가능해야 하고, 신고이후 피해자 관련 정보에 최소한의 인원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피해자정보노출에 주의해야 한다. 조직 내 발생할 수 있는 2차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분리 조치 등 피해자 보호를 최우선 관점에서 조직 내 성범죄 처리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며 “이러한 매뉴얼과 대책은 이미 마련돼 있다. 다만 정부기관이든 사기업이든 잘 이행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고 짚었다.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권수현 대표는 “정치계는 다른 분야보다 미투 고발이 나오지 않은 영역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등 유명인에 국한돼 소수의 미투 고발이 나왔을 뿐 대다수 피해자들은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다”며 “그런 면에서 정치계 성폭력은 훨씬 더 문제적이다. 권력 관계가 훨씬 위계적이고 종속적이므로 이를 고발한 순간 피해자는 생계뿐 아니라 신변의 위협까지 느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권 대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낸 것은 정말 용기 있는 일이다”며 “정치계 성폭력 문제가 심각한데 비해 대책은 미흡하다. 국회 윤리특위는 지난 2018년에 안희정 전 지사 ‘미투’ 이후에 국회 내 성폭력 실태조사를 실시했는데 문제가 심각했다”고 말했다.

지난 2018년에 국회 윤리특위가 국회 내 성폭력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 958명 중 직접 피해를 겪은 성폭력(중복응답)은 성희롱 66명, 가벼운 성추행 61명, 음란 전화·문자·메일 19명, 심한 성추행 13명, 스토킹 10명, 강간 및 유사강간 2명, 강간미수 1명 등을 겪은 것으로 파악됐다.

권 대표는 “당시 국회 사무처 산하에 고충상담실을 열었다. 그런데 담당자가 1명뿐이다. 권한도 크지 않고 위상도 낮다”며 “위계나 위력이 작동하는 조직일수록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권한과 권력을 가진 조직이 갖춰져야 피해자가 신변이나 생계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신고를 할 수 있고, 성폭력을 근절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권 대표는 “정당들은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징계에 불관용 원칙을 고수해야 하고 국회 내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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