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중에 관계없이’ 사족 붙은
오거돈 전 부산시장 기자회견문
충분히 2차 피해 줄 수 있어
적나라한 보도·사건 왜곡 등
언론의 2차 가해도 반성해야

오거돈 부산시장이 23일 오전 부산 연제구 부산시청 9층 기자회견장에서 사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오거돈 부산시장이 23일 오전 부산 연제구 부산시청 9층 기자회견장에서 사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정치권 남성 리더들의 성폭력 사건이 2018년 미투(#Me Too)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성폭력을 중대범죄로 생각하지 않는 가해자들의 안일한 인식이 문제적이라는 지적이 쏟아진다.

여성 직원에 대한 성추행 사실을 인정한 오거돈 전 부산시장은 지난 4월 23일 부산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 사람에게 5분 정도의 짧은 면담 과정에서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했다”며 “이것이 강제추행으로 인정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또한 “경중에 관계없이 어떤 말로도, 행동으로도 용서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기자회견 직후 피해자 A씨는 이날 오후 부산성폭력상담소를 통해 발표한 입장문에서 “그곳에서 발생한 일에 경중을 따질 수 없다”며 “그것은 명백한 성추행이었고, 법적 처벌을 받는 성범죄였다”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강제 추행으로 인정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경중에 관계없이’ 등의 표현으로 되레 제가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비칠까 두렵다”며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을 밝혔다.

김예지 부산성폭력상담소 상담팀장은 부산시장의 기자회견문에 사건에 대한 사과와 인정이 포함돼 있지만 그 세부 내용에 대해 지적했다. 김 상담팀장은 “상담소가 알기로는 오후에 사퇴하는 것으로 소통했다”며 “그러나 갑작스럽게 오전 사퇴 기자회견을 해 피해자 또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퇴 내용에 대해서도 ‘5분 정도의 짧은 면담 과정에서 불필요한 신체 접촉’, ‘경중에 관계없이’와 같은 불필요한 표현이 들어갔다”며 “피해자는 해당 발언에 대해 당황하며 힘들어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뿐 아니라 언론의 2차가해 또한 심각하다”고 덧붙였다.

'비서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항소심에서 3년 6개월 실형을 선고 받은 1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호송차로 이동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비서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항소심에서 3년 6개월 실형을 선고 받은 1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호송차로 이동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번 사건과 함께 미투 운동 중에서도 상징적인 사건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이 다시 주목받는다. 안 전 지사는 광역단체장 중 처음으로 성범죄로 중도 사퇴를 하고 권력형 성범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안희전 전 지사는 ‘합의된 관계’라 생각한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그의 발언 후 피해자에게는 온갖 음모론과 ‘꽃뱀’과 같은 꼬리표가 붙으며 2차 피해가 빚어졌다.

이나영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이번 사건에 대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번 사건은 신고와 사과, 사퇴가 신속하게 처리됐다”며 “'안희정 성폭력 사건' 이후 시민들의 인식이 변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피해자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입장문을 내는 태도도 긍정적 변화”라고 덧붙였다.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기자회견 당시 가해자가 붙인 ‘경중을 떠나’라는 사족”이라며 “이와 같은 본질을 흐리는 표현에서는 여전히 기성세대 문화를 답습하는 남성들의 변하지 않는 습속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또한 언론의 2차 가해를 지적하며 “언론은 당사자가 ‘성추행’이라고 밝혔는데도 기사에 ‘성추문’이라고 썼다”며 구체적인 내용을 보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한 쟁점이 있다면 취재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데도 포르노그래피적으로 묘사하는 태도는 문제적”이라고 말했다.

전국언론노조 성평등위원회와 민주언론실천위원회는 ‘N번방 사건’과 관련해 지난달 24일 긴급지침을 발표했다. 지침에서는 “‘남성 고유의 성적 충동’ 등의 표현으로 남성이 본능을 억제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왜곡된 인식을 심어주어선 안 된다”며 “‘몹쓸 짓’, ‘검은 손’ 등 가해행위에 대한 모호한 표현으로 심각한 인권 침해 문제를 가볍게 인식되게 하거나, 행위의 심각성을 희석하는 부적절한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피해자의 피해사실을 적나라하게 나열하는 기사는 가해자의 범행 본질 흐리기보다도 더욱 문제적이다. 이미 성폭력·성희롱 사건보도와 관련된 가이드라인은 2018년에 마련됐음에도 불구하고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한국기자협회와 여성가족부가 함께 만든 ‘성폭력·성희롱 사건보도 공감기준 및 실천요강’에는 △언론은 성폭력·성희롱 사건을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 소재로 다루거나, 가해자의 책임이 가볍게 인식되는 보도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언론은 성폭력·성희롱 사건의 가해방법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을 지양해야 하고, 특히 피해자를 ‘성적 행위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할 수 있는 선정적 묘사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부산성폭력상담소는 부산시 브리핑 및 언론에 대한 입장문을 지난 24일 냈다. 상담소는 “책임자의 의지 표명, 2차 가해에 대한 엄중 대처, 피해자에 대한 지지 등을 포함한 부산시의 2차 가해 예방 대책은 부산시의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보인다”며 “하지만 보다 강력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대책 발표가 사퇴 기자회견과 동시에 이루어졌어야 함에도 뒤늦게 이행된 것은 유감”이라며 “입장 발표가 늦어진 만 하루만큼의 시간은 언론, 정치권, 댓글 등을 통한 끝없는 2차 가해가 범람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부산시는 오 전 시장의 공약 사항이기도 한 성희롱·성폭력 전담팀 구성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밝혀야 한다”며 “이제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성희롱·성폭력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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