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불교와 미얀마 국민생활

 

미얀마에 가면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파고다(pagoda·탑)이다.

바간의 쉐지곤 파고다, 미얀마 파고다의 어머니라고 불린다. ©조용경
바간의 쉐지곤 파고다, 미얀마 파고다의 어머니라고 불린다. ©조용경

 

오전 시간 거리로 나가면 붉은색의 가사(승려가 입는 옷)를 걸치고, 줄지어 탁발을 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런 모습에서 미얀마는 불교의 나라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미얀마 인구의 89%가 불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미얀마 전역에는 약 6만1000개의 사찰이 있고, 스님의 수는 대략 45~50만명으로 추정된다.

바고에서 만난 스님들의 탁발 행렬. ©조용경
바고에서 만난 스님들의 탁발 행렬. ©조용경

 

미얀마는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가 ‘소승불교’(小乘佛敎)라고 일컫는 ‘테라바다 불교’(Theravada Buddhism·상좌부 불교)를 신봉해 왔다. 상좌부(上座部) 불교는 자기완성, 즉 개인의 해탈에 주안점을 두고 수행을 하는 불교의 유형이다. 역사적으로 미얀마에서는 불교가 전통적으로 국교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 집권 후 불교 지도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모습. ©조용경
아웅산 수치 여사가 집권 후 불교 지도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모습. ©조용경

 

불교가 미얀마의 정신적 지주로 정립된 것은 11 세기에 바간 왕국을 건국한 아노라타(Anawrahta) 왕(1044~1017년)때다. 몬 족 출신의 승려인 ‘싱 아라한’에게 불교를 사사 받은 아노라타왕은 다양한 종교를 상좌부 불교로 통합했다. 아노라타 왕은 최초의 통일국가른 이룬 통치자로서 다양한 민족의 통합을 위해 불교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삼을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 같다. 이때부터 미얀마의 불교는 바간 왕국의 뒤를 이은 여러 왕조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보호 속에서 순탄하게 기반을 넓혀 왔다.

미얀마 불교가 최초의 시련을 겪은 것은 19세기 후반부터 1948년까지 60여년 동안 지속된 영국의 식민통치 기간이었다.

영국 식민 통치자들은 불교를 억압했고, 영국을 대리해 미얀마의 관료제와 경제체제를 장악한 이슬람계 로힝야 족들의 불교 탄압도 극심했다. 이렇게 되자 불교계는 젊은 승려들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의 깃발을 들게 되었다. 1908년 ‘우 오타마’(U Ottama) 스님을 중심으로 미얀마 청년불교도연맹(YMBA) 창설되었고, 이 조직은 반영(反英)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청년불교도연맹 지도자 우 오타마 스님 상, 양곤. ©조용경
청년불교도연맹 지도자 우 오타마 스님 상, 양곤. ©조용경

우 오타마 스님은 1921년 간디 방식의 납세 거부 운동을 주도하다가 투옥되었다 . 또 우 위싸라’(U Wissara) 스님은 1929년 반영 투쟁 과정에서 체포되어, 166일 만에 옥사했다. 이러한 희생 위에서, 미얀마 불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1930년 영국의 식민통치에 피로서 저항한 세야산(Saya San)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마궤이 주에 있는 세야산의 동상. 오른쪽이 세야산이고 왼쪽은 그의 조력자인 타킨보흘라지라고 한다. ©조용경
마궤이 주에 있는 세야산의 동상. 오른쪽이 세야산이고 왼쪽은 그의 조력자인 타킨보흘라지라고 한다. ©조용경

 

세야산 운동은 ‘타라와디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승려 출신으로 미얀마 제단체총평의회(諸團體總評議會·GCBA)의 지도자였던 ‘세야산’이 주도한 반영(反英) 독립운동이었다.

그는 1930년 10월 벼농사의 중심지 타라와디 지역에서, 농민들을 모아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 투쟁은 1931년 5월에 절정에 달했으며, 영국군과 그 앞잡이 로힝야 군은 승려들과 불교도 1만명 이상을 사살하고, 1만여명을 체포 구금했으며, 세야산 등 지도자 급 28명을 처형하고 270명을 종신형에 처했다.

진정한 미얀마 독립의 영웅은 ‘세야산’이나 ‘우 위싸라’, 혹은 ‘우 오타마’와 같은 불교 지도자들이었다.

1948년 미얀마가 60여년 만에 독립정부를 세우면서 초대 수상으로 취임한 ‘우누’는 불교 교단의 내부조직 강화를 위한 ‘사찰법’을 제정했으며 양곤에 ‘불교대학’과 '세계평화사원'을 세웠고, 1961년에는 불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그러나 불교가 국교로 채택되면서 소수 종교의 반발로 인해 기존의 종족분쟁과 함께 미얀마 정국이 혼미한 상황으로 빠져들자, 1962년 네윈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불교도이면서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던 네윈은 ‘불교사회주의’라는 독특한 정치이념을 고안해 냈다. 그는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한 불교의 발언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여 한동안은 미얀마의 군사독재에 대한 불교계의 비판에 재갈을 물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불교계의 침묵은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1988년의 ‘8888 항쟁’에서 승려들은 학생들과 함께 네윈의 군사독재에 피로써 항거했으며, 2007년에는 아웅산 수치 여사를 앞장 세운 10만명 이상의 승려들이 강력한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다. 미얀마 국민의 대다수가 불교를 신봉하고, 불교계를 존중하게 된 내면에는 변곡점 마다 앞장 서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온 불교에 대한 신뢰가 깃들어 있다.

미얀마 문화는 곧 불교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교는 미얀마 인들의 생활양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미얀마에서 불교를 신봉하는 가정에는 거의가 집안에 ‘빠야씬’(pha yar sin)이라는불단을 갖추고 있다.

대다수 미얀마 인들의 가정에서 엄수하는 불교 의식 가운데 하나가 ‘신쀼’ (Shinpyu) 의식이다. ‘신쀼’란 7~13세 사이의 남자 아이들을 몇 주 혹은 몇 개월 간 사원으로 보내 승려생활을 체험하도록 하는 제도다. 신쀼 행사는 일종의 성인식으로, 미얀마의 남자 아이들은 이 시기에 불교의 교리와 함께 미래의 지도층으로서 갖추어야 할 극기와 인내, 배려심 등을 체득하게 된다.

인레 호수의 작은 절에서 본 신쀼 의식. ©조용경
인레 호수의 작은 절에서 본 신쀼 의식. ©조용경

 

미얀마인들이 생활화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의식의 하나가 보시(앗흐루, Ah Hlu)이다. 미얀마는 세계에서 기부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이며, 국민의 90% 이상이 기부에 참여하고 있다. 이런 기부문화는 불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스님이나 사찰에 대한 공양은 곧 사회적인 보시로 이어지기 때문에 가난한 나라임에도 굶어 죽는 사람이 없다. 미얀마 인들의 보시행위를 보면 나눔은 물질의 풍요가 아닌, 정신의 풍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양곤의 마하시 수도원에서의 결혼식. ©조용경
양곤의 마하시 수도원에서의 결혼식. ©조용경

 

미얀마 인들은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가정행사를 절에서 치르거나, 스님이 와서 행사를 주재한다.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이 결혼식으로, 요즘은 도시의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 자란 젊은 세대들은 서양식 결혼식을 선호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절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국민들의 교육도 일정 부분 사원이나 수도원에서 담당하고 있다. 특히 8~9세의 어린이는 지방사찰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는 것이 일상적이다. 오랜 군사독재 하에서 교육이 황폐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문자해독률이 90 %를 넘는 것은 사찰이 운용하는 학교들의 공적이다.

길 가다 만난 스님에게 보시하는 모습. ©조용경
길 가다 만난 스님에게 보시하는 모습. ©조용경

 

딱히 불교문화와 관련된 것은 아니겠지만, 미얀마에서는 남녀간에 삼강오륜의 부부유별(夫婦有別) 관념과 유사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은 여성은 전생에 쌓은 퐁(hpon), 즉 공덕(功德)이 적기 때문에 여자로 태어났다고 믿는 운명론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요즘은 많이 사라지고 있지만, 가정 내에서 부인은 남편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는 안되며, 빨래를 하거나 건조시키는 일도 남편이 보지 않는 곳에서 해야 한다고 한다.

남성과 여성의 구역이 엄격히 구분된 인레 호수의 한 사찰. ©조용경
남성과 여성의 구역이 엄격히 구분된 인레 호수의 한 사찰. ©조용경

 

미얀마의 상당수 사찰에서 여성은 법당 주변에서 기도를 하거나 절만 할 수 있을 뿐, 법당 중앙의 불단에 올라가거나 불상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여성출입금지구역’이라고 표시를 하는 경우도 있다.

쉐다곤 파고다에서 기도하는 일가족. ©조용경
쉐다곤 파고다에서 기도하는 일가족. ©조용경

 

미얀마의 불교도들은 평상시에도 수시로 절을 찾아서 불공을 드리며, 자기의 탄생 요일에는 절에 가서 기도를 하고, 부처를 씻기는 의식을 행한다. 또 4월 중순의 새해 축제(띤쟌) 기간에는 많은 시간을 절에서 보내기도 한다.

만달레이 마하무니 사원의 황금불상. ©조용경
만달레이 마하무니 사원의 황금불상. ©조용경

 

미얀마에는 양곤 중심부의 쉐다곤 파고다, 만달레이의 마하무니(Mahamuni)사원의 황금불상, 그리고 몬 주에 있는 짜익티요(Kyaikhtiyo) 황금바위 사원 등 미얀마 불교의 3대 성지가 있다. 이 세 곳을 세 번씩 가면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인지, 미얀마 인들이 어려움 살림에도 이곳으로 성지 순례를 하는 모습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몬 주의 1102m 산 정상에 있는 짜익티요 황금바위 사원. ©조용경
몬 주의 1102m 산 정상에 있는 짜익티요 황금바위 사원. ©조용경

 

그 밖에도, 미얀마는 국토 전체가 거대한 불교박물관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엄청난 불교유적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미얀마에서 긴 역사와 전국민의 89 퍼센트가 신봉하는, 사실상의 국교인 불교가 당면한 어두운 그림자도 있다.

바로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로힝야’(Rohingya) 소수민족과 불교도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인종갈등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상당히 뿌리가 깊은데, 자비심이 가장 중요한 덕목인 미얀마 불교도들이 유독 이 로힝야 문제에 대해서만은 완고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서 문제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어쩌면 미얀마 불교의 위상을 흔들고, 아웅산 수치 정부의 기반마저도 흔들 수 있는 이 문제에 대한 불교계의 입장은 단호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찌 됐든, 미얀마는 불교가 지배하는 불교의 나라이다. 미얀마 정치의 앞날 역시 불교도들의 손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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