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한국에서 연락이 자주 오던 때가 있었던가 싶다. 가족들과는 가끔 가족채팅방에서 안부를 주고 받고는 했는데, 요즘은 거의 매일 걱정이 섞인 어조로 안부를 묻는다. 알고 지내는 지인들도 전화로 안부를 묻고, 마스크를 구입하기 어려운 이곳의 사정을 알았던지 한국에서 구입해 주겠다는 분들도 많아졌다. 스웨덴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국민을 대상으로 항체를 만들어 코로나19에 대응한다는 뉴스가 한국에 빠르게 전해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처음에는 한국이 세계에서 두번째로 가장 많은 확진자가 발생할 때까지만 해도 고운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이웃들까지도 확진자가 그렇게 빨리 늘어가는데 정부의 대응능력은 그것 밖에 못되느냐고 비아냥거리가 일쑤였다. 거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의 머리카락만 보고 주춤하고 돌아서 가거나, 옆을 넓직하게 피해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가슴속 깊숙이 잠자고 있던 향수병이 고개를 들곤 했다. 배신감이나 소외감이 불쑥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 다음으로 미국이 빠르게 한국을 추월하더니 한국 밑에 포진하고 있던 유럽국가들이 우리나라를 빠르게 추월해 가는 통계수치는 한국과 한국인을 다시 보게끔 하는 대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스웨덴 일간신문과 방송에서 한국의 성공모델을 대서특필하고 스웨덴 최대 다겐스 뉘헤테르 일간지는 직접 특파원을 한국에 보내 특집을 만들어 소개할 정도였다. 이제 한국이 너무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주는 지금의 모습을 보면서 몇 주 전 우리를 의료후진국으로 취급하던 때와 대조적으로 변한 그들의 모습에서 씁쓸함이 느껴진다.

봄학기가 1월말에 시작하는 대학학제때문에 한참 진행되던 강의가 2주 전부터 화상원격강의로 대체되었다. 학생들로 붐비던 캠퍼스는 최소 교직원과 화상강의를 준비하러 나온 교수들 몇명만이 지키고 있어 정적이 흐른다.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한참 진행되던 강의의 마지막 수업을 할 때의 기분은 스웨덴에서 24년동안 강의를 하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한 학생이 던진 말이 귀에 아직도 생생하게 들려온다. “우리가 어쩌면 다시는 못 만날 수 있으니 사진 한 장 찍으면 안될까요?” 20여명의 학생들은 숙연해졌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각자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내 눈에는 스웨덴 사람들이 낙관적으로 보였다. 복지가 워낙 잘 되어 있어 건강, 실업, 의료, 교육, 출산 등으로 인해 걱정할 필요가 없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거리, 카페와 생맥주집은 걱정하는 사람들보다 낙관적인 사람이 더 많았다. 자신이나 자녀가 아프면 결근하면 되고, 실직하면 잠시 마음은 아파도 다시 재취업할 수 있는 기회는 열려 있으니 그렇게 걱정이 많은 사람들은 아니다. 당장 정리해고를 당해도 사회안전망이 잘되어 있어 다시 노동시장에 복귀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대학이 무상이고 교육기간동안 생활비지원 프로그램이 있어, 직종변경 후 재취업이 가능하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기능장애인 자녀가 있어도 자치지방정부에서 다양한 지원프로그램이 있어 부모는 크게 생활에 위축받지 않는다. 대학을 보내려고 사교육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고, 굳이 대학에 보내지 않아도 자녀들이 알아서 18세가 되면 독립해서 취직하니 자식의 취직과 결혼 등의 스트레스도 거의 없다. 참 행복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낙관주의는 복지제도가 잘 갖춰진 국민의 한 단면이다.

그런데 코로나19 전염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서서히 비관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다양한 사회복지와 교육, 그리고 의료 및 보건서비스는 일시적으로 국가적 위기가 닥쳐오면 바로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스웨덴의 국가작동방식이 맞벌이부부의 틀로 갖춰진 복지경제체제라는 것이 핵심 문제다. 스웨덴 여성 취업율은 78%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다. 초등학교를 차단하고 싶어도 집에서 아이를 돌볼 수 있는 보호자가 없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되기 어렵다. 부모가 모두 직장을 나가기 때문이다. 최근 재택근무를 권장하고부터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IT 계열 등 한정적 직업군에만 해당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앞에서 소개한 사회복지서비스와 의료, 건강, 보건, 교육, 실업, 장애인서비스 등의 공공서비스 종사자가 창출하는 경제적 재화는 스웨덴 국민총생산에서 33%를 차지한다. 다시 말하면 탁아소와 초등학교를 폐쇄하면 의료, 보건, 건강영역에서 활동하는 복지서비스 종사자들이 가정에 묶일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러한 맞벌이부부의 가족경제활동에 맞춰 사회복지서비스체계가 갖춰져 있기 때문에서 코로나 방역대응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스웨덴코로나대책본부에서는 탁아소와 학교를 가급적 닫지 않아야 스웨덴의 병원, 보건소, 노인시설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이 집에 묶이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정책을 세웠다. 방역책임자는 한 발 더 나아가 국민항체를 만들어 코로나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다는 논리를 앞세워 방역대책을 세웠다. 스웨덴의 사회복지체계와 맞벌이부부경제제도의 틀 속에서 국가가 작동하기 위한 대책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 방법도 한계에 온 듯하다. 전염자가 너무 빠르게 확산되어 병상, 의약품, 방역장비가 빠르게 동나기 시작했고, 중환자실이 급속하게 포화되면서 한계에 직면한 것이다. 스웨덴의 짧은 실험은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새로운 정책으로 전환되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빠른 검사를 통해 감염자를 확인해 격리하고, 초등학교수업을 원격수업으로 대체할 계획이다. 공공복지제도의 틀에서 구축되 스웨덴 모델이 최대위기를 맞는 셈이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세계는 완전 새로운 상황이 된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에서 앞으로는 ”바보야 문제는 국민의 안전과 위기대응능력이야”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 모르겠다. 모든 나라들이 국가운영제도와 다양한 위기 대응체제를 위해 다시 판을 짜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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