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정병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문화인류학자이자 구호활동가
북한 아동 구호와 교육 위해
90년대부터 10여차례 방북
북한 삶·문화에 대한 현장기록
『고난과 웃음의 나라』 출간
북한도 사람 사는 곳…
야만·악함으로 타자화 말아야

정병호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홍수형 기자
정병호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북한의 변화와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그동안 어떤 조건에서 무슨 경험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홍수형 기자

 

“미화가 아닌 현실이에요.” 1990년대부터 10여차례 북한을 방문하고 탈북민과 교류해온 정병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본질적인 부분을 잘 포착해서 잘 표현해냈다”고 말했다. 스토리는 허구지만, 배경인 북한의 생활상은 잘 담아냈다는 평가다. 남에서 온 재벌 2세 CEO와 조선인민군 민경대대 5중대장의 로맨스를 그린 이 드라마는 방송 초반 ‘북한 미화’라는 지적을 받았다. 화려한 백화점과 운영자인 ‘돈주’(錢主·신흥부호층)의 모습을 비롯해 장마당(시장)에서 남쪽 물건을 사고 팔며 북한 군인들이 사택에서 남한의 전기밥솥을 사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간첩’, ‘핵무기’가 등장하며 비장감 넘치던 기존 드라마와 달리 흔한 ‘한드’(한국드라마) 속 커플처럼 남녀북남이 알콩달콩 사랑싸움을 하는 전개도 신선했다. 탈북민 출신 작가가 대본 작업에 참여하며 북한의 생활상을 반영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제작사 측 설명이다. 

정 교수는 남과 북이 오랜 세월 절연된 채 살면서 서로 증폭시킨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 곳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라고 했다. 

“북한은 우리에게 가장 대표적인 ‘타자’가 아니겠어요. 우리는 ‘다름’을 우월감이나 열등감으로 서열화해 의식하는 버릇이 있지요. 그동안 북한을 문명적이지 않은 존재로서 ‘야만’, 선함에 대비되는 ‘악함’의 상징으로 여겨왔어요. 냉전과 전쟁, 분단까지 겪고 절연돼 있는 상태로 70년을 넘게 살며 상대방을 마음껏 이미지로만 규정하고 증폭시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 군사분계선 너머의 북한은 실재하지만 우리에게는 낯선 세계다. 분단 체제로 75년을 살다보니 북한은 ‘알다가도 모를’ 곳이 돼버렸다. 여전히 아이들은 북한 하면 ‘전쟁’, ‘군사’, ‘독재’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교육부·통일부, ‘2019년 학교통일교육 실태조사’). 문화인류학자이자 구호활동가로서 오랫동안 북한 ‘사람들’과 소통해온 정 교수 역시 “냉전시대의 반공교육의 사고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처음에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했다. 

정 교수는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을 통한 대안교육 운동뿐 아니라 탈북 청소년 교육사업에 헌신해 온 교육 실천가다. 1996년 봄, 북한이 ‘고난의 행군’으로 미화하는 대기근으로 먹지 못해 병들어 죽어가는 어린이 사진 한 장이 그의 삶을 바꿔놨다. 조형, 이기범 교수 등과 함께 ‘남북어린이어깨동무’를 만들고 기근 구호활동을 시작했다. 북한을 오가며 사람들을 만난 정 교수는 이 경험을 기록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분단 시대에 비정상적인 사고 구조를 갖게 된 양쪽 집단이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하고 협력해야만 하는 파트너가 되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의 잘못을 기록하고 증언해야 한다”는 학자이자 활동가로서의 사명감이 컸다. 

“바로 옆에서 100만명 넘게 죽어가는데도 ‘그대로 놔두면 북한 체제는 곧 붕괴한다’는 예측 때문에 김영삼 정부는 굶주린 아이들을 위한 모금을 방해했어요. 모금액을 북한에 전달할 수 없도록 막아 모금액을 3년간 안고 있어야 했습니다.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야 민간단체가 대북 접촉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20년 전 같은 민족이 죽어갈 때 상대의 고난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저열한 정치가 있었다는 것을 증언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난해 2월 정월대보름에 평양 어린이들이 김일성광장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며 즐거워 하고 있다. 최근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것이 북한의 새로운 풍속도로 등장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지난해 2월 정월대보름에 평양 어린이들이 김일성광장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며 즐거워 하고 있다. 최근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것이 북한의 새로운 풍속도로 등장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정 교수는 그간 북한의 삶과 문화에 대한 현장기록을 정리해  『고난과 웃음의 나라』(창비 펴냄)라는 책으로 펴냈다. 자본주의를 방불케 하는 북한 내 변화와 북한 사람들의 가치관에 대해 세밀하게 묘사했다. 기근 구호활동을 위해 실무자들과 협상테이블에 앉아 지난한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의 협상 전략을 문화적 ‘아비투스(habitus·친숙한 사회 집단의 습속·습성)’라고 설명한다. “틈새의 해학”을 즐기며 덕담을 나누다가도 돌연 도덕적 우위에 서서 트집을 잡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감정적으로 대화를 끝내버리는 행동패턴은 “나이와 계층을 초월해 북한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내면화”돼 있다. 그들에게 자존심은 늘 실리보다 앞선다. 정 교수는 “우리를 인정해달라, 그리고 이해해달라는 절박한 사람들의 말법이고 몸짓”이라며 “무기를 내려놓게 하려면 우선 그 마음을 알아주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강남8학군 ‘스카이캐슬’ 못지 않게 뜨거운 평양 엄마들의 교육열과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경제 주체로 선 여성들의 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더욱 강화된 가부장적 가족질서는 남한사회와 꼭 닮아 있다.  

정 교수는 남과 북이 문화적 이질성과 서로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출발점은 결국 “존중과 공감”이라고 했다.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을 만날 때는 서로 살아온 삶의 경험에 대한 존중과 공감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서로가 손가락질하며 혐오와 증오를 키우면 갈등과 분쟁으로 갈 수도 있어요. 이럴 때 근본적으로 소통하고 길을 찾아야 합니다. ‘역지사지’로 성별, 민족, 지역, 인종 등에 따라 차별을 받지요. 한국 최고의 엘리트라도 해외에선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기도 해요. 집단의 특징을 차별 근거나 우열의 근거로 삼고 그것을 자연의 원리처럼 여기면 안되죠. 한번에 차별을 없앨 수 없더라도 차이를 존중하며 달라도 최소한 서로 상처는 주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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