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국회서 강간죄 개정 약속한 정당들
21대 총선 공약에서 슬그머니 관련 내용 없애
정의당, 국민의당만 ‘비동의 간음죄’ 개정 약속
미래통합당 가정폭력에 이어 강간죄 개정 내용 언급조차 없어
민주당 비동의 간음죄 도입 ‘검토’ 약속
민중당 성폭력 피해자 대상으로 한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

21대 총선을 앞두고 각 당에서 앞다투어 여성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W정치인사이드는 4.15 총선에서 각 당의 여성 정책을 분야별로 나눠 샅샅이 분석한다. 3월 8일 ‘스토킹 범죄’ 편에 이어 4편에서는 '강간죄' 공약을 다룬다.

‘왜 당할 때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어요?’

67년째 바뀌지 않는 질문이다. 67년의 세월 동안 성폭력 피해자들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형법 상 강간죄는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또는 현저히 곤란한 정도’로 폭행과 협박을 당해야 성립된다. 성폭력 발생의 많은 수가 폭행*협박 없이 발생하지만, 법적으로는 ‘성폭력’이 아니기에 가해자들은 면책되고 피해자들은 구제받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다. 억울함을 견디지 못해 자기 피해사실을 공론화한 피해자들은 오히려 범죄자가 되기도 한다. 실제 미투운동 이후 가해자들이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하는 사례가 이어졌다.

미투운동으로 한국이 부글부글 끓던 재작년, 여야 5개 정당 모두 ‘비동의 강간죄’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통과되지 않았다. 21대 국회에서 강간죄는 개정될 수 있을까?

 

28일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제 10차 페미시국광장 '강간죄를 위한 총귈기'가 열렸다. 집회 후 광화문일대 행진을 했다.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28일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제 10차 페미시국광장 '강간죄를 위한 총귈기'가 열렸다. 집회 후 광화문일대 행진을 했다. ⓒ여성신문

정의당은 여성공약 가장 첫 장에 비동의 강간죄의 조속 개정을 약속했다.
정의당은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과 협박’이 아닌 ‘동의여부’로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더불어 강간죄 법률의 체계를 정비하겠다고 했다.

국민의당 또한 ‘비동의 간음죄’ 개정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국민의당은 명시적 동의의사 원칙에 따라 성범죄를 엄벌하겠다며 형법 개정의 의지를 밝혔다. 또한, 폭행, 협박, 위협, 무력사용이 동반된 성폭행 범죄에 대해서는 집행유예나 감형 적용을 없애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두 정당뿐이다. 20대 국회에서 강간죄 개정안을 발의한 더불어민주당·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 중 정의당, 국민의당 오로지 두 정당만이 강간죄 개정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현행법상 강간죄는 ‘최협의설’을 바탕으로 성립된다. 강간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 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한성폭)의 <2017년 상담통계>에 따르면 한성폭의 한 해 총 사건상담 중 강간죄 최협의설 구성요건을 갖춘 사건은 단 12%에 불과하다. 피해자의 격렬한 저항, 폭행이 동반되는 성폭력보다 사각지대에 놓인 사건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강간죄 구성요건을 활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도 있다. 음주, 약물, 수면상황 등 피해자가 저항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범죄를 저지르거나 범행 이후 ‘카톡’ 등 대화를 이용해 피해자와 친밀하다고 증명하며 성폭력이 아님을 주장하기도 한다.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8년 한국 정부에 형법 제 297조 즉 강간죄를 개정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앞에서 열린 강간죄구성요건의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앞에서 열린 강간죄구성요건의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성신문

민중당은 성폭력 피해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허위사실 명예훼손죄는 친고죄로 개정하겠다고 한다. 
미투운동 이후 성폭력 사건을 폭로한 피해자 중 적지 않은 수가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렸다. 영화계의 대표적 ‘미투 운동’ 대상이던 김기덕 감독 사건이 그렇다. 김기덕 감독은 작년 3월 한국여성민우회(민우회)를 대상으로 3억 원의 소송을 제기했다. 

“전 남자친구가 목을 조르며 강간했고, 원하는 게 뭐냐고 해서 돈을 달라고 했더니 매달 나눠서 주겠다고 했다. 학과 특성상 계속 공동작업을 해야 해서 학교 교수님한테 말했더니 자퇴하겠다던 가해자가 공갈과 명예훼손으로 나를 고소했다.”

<D상담소, 사례167>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성폭력피해상담 분석 및 피해자 지원방안 연구> 내용 중 일부다. 해당 연구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는 피해자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도록 사법절차를 이용한 가해자의 보복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정당한 징계나 처벌을 받지 못한 성폭력 사건들은 미투의 방식을 통해 ‘공적인 말하기’로 드러난다.’며 성폭력 관련한 사법 체계와 피해자 보호 체계가 미흡한 한국 사회에서는 미투를 사적인 것이 아닌 공적인 담론으로 읽어야 한다고 해석한다. 

UN에서도 지난 2018년 3월 한국 정부에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형사소송 남용을 막기 위해 모든 조처를 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28일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제 10차 페미시국광장 '강간죄를 위한 총귈기'가 열렸다.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28일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제 10차 페미시국광장 '강간죄를 위한 총귈기'가 열렸다. ⓒ여성신문

민주당은 비동의간음죄 개정이 아닌 ‘검토’를 약속했다. 성범죄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실효적 방안을 적극 강구하겠다고 밝히지만, 비동의간음죄 ‘검토’ 공약 앞에서 그 의지가 무색해지는 모양새다.

익명의 여성단체 활동가는 “20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을 발의해놓고 21대에서 검토하겠다는 것은 여성들의 뒤통수를 치는 격”이라며 “다른 공약에는 개정하겠다, 제정하겠다 확실한 입장을 밝히면서 왜 비동의 간음죄에서는 유독 소극적이냐?”고 비판했다.

미래통합당의 공약에서는 강간죄 개정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없다.

<공약평가>

협소한 성폭력 범죄 구성 요건은 성폭력 사건을 가해자의 관점에서 해석되게 만든다. 비난의 화살은 피해자에게 돌아간다. 성폭력 가해자는 고발되지 않고, 한국 사회 내 성폭력 문화는 팽배해진다. 이런 악순환을 막기 위해 폭행 협박 없는 성폭력은 범죄라는 분명한 정의가 필요하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김수희 활동가는 통화를 통해 “강간죄 개정은 지난 국회에서 10개의 발의안이 나왔을 정도로 국회에서 경쟁하듯 발의해놓고 이후 제대로 논의하지 않은 것에 유감스럽다”며 21대 국회에서는 반드시 비동의간음죄를 우선하여 개정안을 통과시키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간죄 개정이 종착지는 아니다. 

여성인권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캐서린 매키넌 미시간대 교수는 2019년 12월 한국 초청강연에서 “강간죄 구성요건을 ‘동의’로 바꾼다고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라며 동의의 입증 책임 또한 여성이 떠맡게 될 우려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매키넌 교수는 당시 “젠더/빈곤/인종/계층 등 강간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 불균형을 고려하는 법체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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