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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향미>

젊은이는 나무로부터

생겨난 작은가지,

노인은 나무의 뿌리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30대의 B씨는 미국에서 사는 동안 할머니들이 가장 무서웠다며 고개마저 설레설레 흔들었다. 웬 할머니괴담이냐고? 내용인 즉슨, B씨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건강이 좋지 않았고, 특히 허리가 무척 아파서 무거운 짐을 들 수 없었다. 심지어 수박 한 덩이도 들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시장을 봐 올 때에도 아내가 항상 무거운 짐을 들 수밖에 없는 딱한 처지였다.

그런데 그가 살던 아파트 단지 내의 나무 벤치에는 항상 미국 할머니들이 몇 명씩 앉아 계셨던 것. 이 할머니들은 평소에는 커피와 직접 구운 케이크 등을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대접하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말도 거는 등 상냥하고 친절해 보였으나, 무거운 짐을 아내에게 맡긴 채 혼자 휘휘 걸어오는 동양 남자 B씨에게 단 한 번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질문을 해댔다는 것이다.

“왜 너는 짐을 들지 않고, 네 와이프가 짐을 드느냐?”

“너희 나라에서는 남자가 짐을 들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느냐?”

허리가 아파서 짐을 들 수가 없노라고 설명하는 것도 한 두 번이었다. 게다가 할머니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어제 몇 명의 할머니께 공들여 설명을 했는데도 다음 날엔 다른 할머니들이 처음부터 다시 질문을 시작하는 통에 나중에는 팻말이라도 붙이고 다니고 싶을 정도였다. 동방예의지국에서 노인들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고 배운 B씨로서는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 힘들었던 건 그가 아무리 설명해도 “멀쩡하게 생긴 젊은 놈이 혹시 꾀병하는 것 아냐?”하고 의심하는 듯한 할머니들의 눈초리였다. 결국 그는 멀리서라도 할머니들만 보면 숨고 싶을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나는 이 할머니들이 비록 적극적으로 어떤 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되지 못하게 권위적으로 보이는 동양 남자에게 제재를 가함으로써 국제적 차원의 여성보호에 앞장서야겠다는 사명감(?)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할머니들은, 비록 의식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작은 행위를 통해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회적 가치를 대변하고 지키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노인을 포함한 기성세대들은 참 말이 없다. 아니, 점점 말이 없어진다. 위의 상황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다면 우리 할머니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얼마 전까지라면 여자가 시장바구니 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할 말이 없었을 테지만, 요즘엔 설사 맘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괜히 젊은이들의 일에, 그것도 내 가족도 아닌 남의 일에 간섭해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사회적 가치의 부재나 혼돈 문제가 심각하다. 세상은 점점 더 합리적이면서도 유연한 사고를 필요로 하지만, 우리 사회는 자기만 옳고 상대방은 무조건 그르다는 이분법적인 싸움으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그 싸움의 한 복판에는 자유롭고 똑똑하며 확신에 차있는 듯이 보이는 젊은이들이 있으며, 나이든 사람들은 왠지 기가 죽은 채 저 멀리 비켜서 있다. 50대 후반 L씨의 표현은 매우 일리가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억울한 기분이 들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50대도 너무 젊다는 분위기가 아니었나요? 그런데 갑자기 케케묵은 기성세대 취급을 받게 되다니… 그것도 불과 몇 년 사이에… 지난 대통령 선거 이후에는 더 심해졌고요. 정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요.”

하지만 나는 젊은이들은 굵은 나무로부터 생겨난 하나의 작은 가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본다. 반면 나이든 사람들은 나무의 뿌리와도 같다. 나는 상상해 본다. 이처럼 혼란스러울 때 나이든 사람들이 나서서 말로, 혹은 행동으로 어떤 사회적 가치를 수호해 준다면, 새로운 변화와 젊은이들의 취향을 이해해 주면서도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를 가르쳐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명인사들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나선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나라에도 약 2년 전부터 직장을 퇴직한 50세 이상의 시니어(!)들을 새로운 소득 창출과 사회참여의 주체로 인식하고 역동적인 노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정부가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지역사회시니어클럽(Community Senior Club)이 결성되었다.

나도 이 클럽의 여자 시니어들이 새로운 소득 창출의 수단으로서 만들어 팔고 있는 김치와 반찬을 먹어본 적이 있는데, 좋은 재료와 손맛 때문일까, 정말 맛이 있었다. 김치의 시장성이 점점 커지지만 각 지방의 고유한 맛은 사라지기 쉬운 현실을 감안할 때 참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특히 더 흥미로웠던 것은 시니어들이 환경지킴이나 숲 해설가, 유적지 및 관광지 개발이나 가이드와 같은 지역사회 봉사사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만일 나이든 사람들이 환경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다면, 숲을 보호하며 숲의 언어를 우리들에게 해설해줄 수 있다면, 우리의 오랜 문화유산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역할을 한다면 환경문제를 둘러싼 싸움은 줄어들 것이고 문화는 훨씬 풍요로워지지 않겠는가. 아니, 무엇보다도 우리가 지켜야 할 것과 바꿔야 할 것에 대한 잣대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즐거운 상상은 계속된다. 아마 언젠가는, 가정과 사회의 남녀불평등을 줄이고 할머니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가칭 ‘할머니세상’ 사이트도 생길 것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할머니들의 모임(나할모)’이 결성되어 여자대통령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할아버지들도 가만히 계시지는 않겠지. 아, 그 때가 되면 청소년문제나 교통문제도 훨씬 줄어들 테니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 될까.

한혜경/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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