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선 여성신문 발행인
김효선 여성신문 발행인

 

여성운동의 대중화는 디지털 시대의 개막과 함께 시작됐다. 소셜미디어(SNS)는 대규모 여성들의 시위를 촉발시키는 강력한 소통도구가 되었다.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여성 혐오에 의한 여성 살해 등의 이슈에 공감하는 여성들은 SNS를 통해 익명의 연대를 결성해서 집단적인 목소리를 표출할 수 있었다. 디지털 시대의 SNS는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고 여성운동을 질적·양적으로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효율성이 거꾸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성착취, 성폭력에서 파괴력으로 작용하고 있어 각별한 대책이 필요하다. 최근 텔레그램에서 벌어진 조직적 성착취 사건인 ‘n번방’ 사건은 SNS가 여성 인권 억압에서 얼마나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독일회사가 개발한 ‘보안성 높은 무료 메신저’ 텔레그램은 추적이 되지 않고 보안성이 높다 고 해서 고급정보를 은밀히 나누기에 적합한 메신저로 알려져 있었다. 그 높은 보안성이 여성의 몸을 불법촬영한 성착취물이 은밀히 거래되는 신종 노예시장의 온상이 될 줄 상상할 수 없었다. 실상은 알면 알수록 끔찍했다.

남자 이용자가 대다수인 ‘남초 커뮤니티’에 여성 성착취물을 볼 수 있는 텔레그램 비밀방이 있다는 홍보물이 뜨고, 그 홍보를 따라가면 숫자가 붙은 여러 개의 비밀방이 개설돼 있다. 각 방마다 주거지, 나이, 직업, 때로는 실명까지 공개된 피해 여성의 사진과 영상이 올려져 있다. 이 피해 여성들은 ‘노예’라고 불린다. 각 방마다 수십명에서 수만명까지의 가담자들이 그 ‘노예전시’를 즐기는 공범이 되는 곳이 텔레그램 n번방이다.

보도에 따르면 닉네임 ‘갓갓’은 미성년 소녀를 유인해 불법촬영을 하고 ‘노예가 되겠다’는 각서를 쓰게 하는 등의 수법으로 수익을 취하다가 권한을 팔아넘기고 잠적했다. 또 가장 유명한 닉네임 ‘박사’가 운영한 방은 ‘고객’이 2만3000명에 이르렀다. 박사는 급전이 필요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고액알바로 유인해 주민등록증을 확보하고 나체 사진을 찍어 불법촬영물 장사에 나섰다.

현행법상 이런 행위들은 물론 불법이지만, 텔레그램의 높은 보완성과 디지털 효율성이 수사를 어렵게 만든다. 운영자들은 해외 서버를 이용해 잠적·폭파·신설·대피를 반복해가며 광속으로 움직이는데다, 결제도 암호화폐를 사용해 흔적을 남기지 않으니 범인 특정이 더욱 힘들다. 피해여성들이 느끼는 자책과 공포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성착취 가해자들은 피해여성들의 취약한 심리상태를 이용해 ‘부모에게 알리겠다’, ‘공개하겠다’고 협박해서 피해자들을 옭아맸다.

여학생 불법촬영물이 100장에 1만5000원, 363개에 5만5000원에 거래되는 현장고발(십대여성인권센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피해는 가장 어린 여성들에게 더 심각하다. 이런 불법 촬영물 거래소 운영자의 60~70%가 10대라고 한다. 청소년기의 범죄적인 경험이 여혐 트랜드의 뿌리가 될 것 같아 걱정스럽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경찰 사이버수사대가 새로운 수사기법을 개발해서 ‘n번방’ 운영자 등 66명을 구속했고, 일반 여성들이 모여 만든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ReSET(리셋)’이 올린 국민동의청원이 성립되어 국회가 입법절차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있었다. ‘n번방사건 공동대책위원회’도 꾸려졌다.

21대 국회에서 제일 먼저 다룰 과제로 기억해주길 당부한다. 경찰의 사이버수사력 강화에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불법 촬영물을 기획·제작·유포·매매·시청한 모든 가해자를 철저히 수사하고 엄중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 성착취 불법촬영물은 ‘살인과 다름 없다’고 말할 정도의 중범죄다. 누군가의 돈벌이를 위해 인격권이 통째로 파괴당하는 세상에서 여성들이 무서워서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성착취 불법촬영물은 우리 사회가 허용하지 않는 범죄이며, 범인은 반드시 잡히고, 범죄는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것이 민생치안의 기본일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또 묻는다. 왜 우리의 국가는 여성들의 안전을 이토록 지키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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