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깨가 깨끗이 핥은 술잔을
두 발로 껴안고 해롱대고 있었다
내 평생 술 취한
고양이를 보게 될 줄이야!

풀밭에서 잠에 취한 고양이. ©needpix
풀밭에서 잠에 취한 고양이. ©needpix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올 때,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이 넓은 창이었다. 집은 허름했지만, 골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2층의 넓은 창들은 골목을 떠나 실내에서 처음 살게 될 냥들에게 멋진 선물이 될 터였다.

이사한 집에서 맞는 첫 봄. 친구가 마따따비라고 불리는 개다래나무 묘목 두 그루를 선물로 보냈다. “다시 여행하다, 라는 뜻을 지닌 나무야. 여행을 할 수 있을 만큼 다시 기운을 차리게 하는 나무라니 멋있지 않니?” 나는 나무 한 쌍을 집 근처 좁은 공유지에 심었다. 내가 밥을 주는 고양이들이 오가며 잠깐이라도 기분을 낸다면 좋겠다 싶었지만, 밋밋한 모양새는 친구 말대로 고양이가 “환장”할 것 같지는 않았다.

개다래나무가 조금 자랐다. 고양이들이 정말 환장하고 달려들었다. 막 새 잎을 틔우기 시작한 수나무는 심자마자 땅 위 3센티 가량만 남긴 채 해체되었다. 고양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옆으로 기운 그 짧은 가지엔 볼 때마다 고양이털이 뭉쳐 있었다. 신기하게도 바로 옆에 심은 암나무는 무사했다. 암나무에 열리는 열매에 또 고양이들이 환장한다기에 나는 무사히 남은 암나무라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물을 줬다. 개다래나무를 심은 그 작은 공유지에 해마다 여러 그루의 꽃나무를 심었지만, 그 나무들은 며칠 안에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내가 그 발등만한 땅에 해마다 온갖 꽃나무를 심는 것은, 우리 동네의 미관을 위해서도, 돈이 남아돌아서도 아니다. 길고양이 급식처를 싹 없애버려야 한다고 우기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 땅은 급식처가 될 수 있는 오아시스가 된다.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무리 작은 공간이라도 선점권을 갖고 싶었다. 꽃나무를 심으면 캐가고 심으면 캐가고 하던 동네 사람들이 볼품없는 개다래나무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암나무마저 사라져버렸다. 아직 물기가 남은 작은 구덩이만 남아 있었다. 나무를 캐간 사람은 내가 하루도 빠짐없이 물을 주는 것을 지켜보다 그 나무가 ‘분명히 대단한 나무일 거라!’ 믿었을 것이다.

처음 개다래나무 한 쌍이 왔을 때, 나는 잎을 몇 개 따서 우리 집 고양이들에게 던져주었다. 녀석들의 반응은 신기했다. 특히 나의 5호 고양이 참깨는 아편굴에 들어앉은 것처럼 헤롱대다가 흥분에 겨워 떼굴떼굴 굴렀다. 가장 겁이 많은 2호 고양이 써니도 나의 시야를 벗어나 개다래나무 잎을 핥다가 감정이 고조되면 커다란 몸뚱이를 꿈틀꿈틀 틀다가 참깨 모양으로 몸을 굴렸다. 내가 절대로 줄 수 없는 기쁨을 나뭇잎 한 장이 무한 제공하고 있었다.

암나무까지 사라져버렸다고 하자, 친구는 개다래 묘목을 다시 사 보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묘목을 화분에다 심어 햇빛이 적당히 드는 베란다에다 두었다. 동네 고양이들이 베란다에는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따따비 향은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개다래 냄새를 맡은 고양이들이 끊임없이 베란다로 올라왔다. 화분 위에 올라앉아 얼마나 굴러댔는지 볼품없이 찢어진 나뭇가지엔 고양이털이 솜사탕처럼 뭉쳐 있었다. 우리 집 베란다가 드디어 뚫려버린 것이다.

친구가 이번엔 냉동 개다래 열매를 택배로 보냈다. 해동시켰더니, 열매 안에 있던 풀잠자리 알이 부화해서 잠자리가 폴폴 날아다녔다. 생명의 힘이 참으로 신기했다. 이번에도 참깨가 가장 먼저 홀렸다. 그래서 나는 고양이들이 축축 늘어지는 궂은 날이면 냉동실에서 열매를 꺼내 녀석들 앞에 던져줬다가, 풀잠자리 알이 부화되지 않도록 다시 냉동실에 넣어버리곤 했다.

개다래나무 스토리의 클라이막스는 개다래술 사건이다. 친구는 개다래 열매로 담은 술이 항암에 좋다며 내게 반주로 조금씩 마셔 보라고 했다. 불면의 밤을 지새우던 어느 날, 나는 잠을 자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한 잔 따라 마셨다. 술은 생각보다 독했고, 풀잠자리 액을 마시는 듯해 저절로 미간이 접혔다. 술기운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을 때였다. 어디선가 갈증에 겨워 급히 물을 핥는 소리가 났다. 어느 녀석이 무척이나 목이 말랐나 보다 하며 나도 물을 좀 마시려고 나가 보니, 참깨가 깨끗이 핥은 술잔을 두 발로 껴안고 해롱대고 있었다. 놀란 내가 술잔을 빼앗아 설거지통에 담그자 녀석은 싱크대로 뛰어올라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고꾸라질 것 같은 자세로 물속의 술잔을 건져 올리려 했다. 내 평생 술 취한 고양이를 보게 될 줄이야!

개다래 술을 ‘즐긴’ 참깨 이야기를 듣고 친구도 헝겊에 개다래술을 적셔 자기 집 고양이에게 줘봤단다. 독한 냄새에 얼른 고개를 돌리더란다. 그런 걸 보면, 참깨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술깨나 마셨을 것 같기도 하다. 8년 전 세상을 떠난 나의 개가 커피를 아주 좋아해 나와 늘 나눠 마셨던 것처럼 동물들에게도 기호식품이 있는 것도 같다.

참깨는 온몸에 붕대를 감는 여러 번의 수술 때문에 넉 달이나 병원에 있었다. 나긋나긋한 모습으로 길에서 살 때 모습에서 돌변하여 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상태로 목 칼라를 한 채 집에 들어온 지 1년 6개월이 되었으나, 지금도 나는 참깨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 자기를 병원에서 고생시킨 것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녀석에게 어느 날 개다래 술을 제대로 한 번 먹여볼까? 녀석이 발톱 끝까지 흐물흐물해지는 틈을 노려 품에 꼭 안고, 따끔하게 내 집의 서열을 가르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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