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 온 새해에도 사건의뢰는 쏟아져 들어오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그 사건들 속에서 첨예하게 문제되는 논점들은 지금이나 작년이나 그리고 그 전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말이 갖는 한 가지 함의. 실무현장에서 혼선을 빚고 있는 부분들이 아직도 정리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있다는 뜻이다.

어느 대학에서 지난 해 내렸던 징계처분이 얼마 전 서울행정법원에서 취소되어버린 모양이다. 필자도 해당 학교에 자문의견을 제공했던 적이 있던 터라 이런 기사가 나오면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잔뜩 긴장! 얼른 사무실로 뛰어 들어와서 ‘내가 무슨 의견을 제출했던 거였지? 이 사건이 그 사건이었나?’라고 정신없이 중얼거리며 의견서를 찾아본다. 필자와는 관련이 없다는 한 순간의 안도감!

기사를 읽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잠깐 소개한다. <남학생들만의 모임에서 여학생들에 대한 성희롱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은 (…) 재학생들이 “징계처분을 취소해달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했다. (…) 재판부는 학교의 징계 과정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 대학교 내의 고충심의위원회는 지난해 5월 A씨 등에게 성희롱 행위가 있었다는 결론을 전하고, 9일에는 학교 측에 징계처분을 요청했다. 학교 측은 바로 다음 날 A씨 등의 의견을 들은 뒤 징계처분을 내렸다. 재판부는 “처분 전에 사전통지도 하지 않았고, 의견을 제출할 충분한 기한도 주지 않았다”며 “처분의 원인이 되는 사실도 전혀 기재하지 않아 행정절차법을 위반했다”고 말했다.(중앙일보 2020년 2월2일자, 백희연 기자)>

기사문을 읽으며 필자는 또 한 번 ‘뒷목을 잡을 수밖에는’ 없었다. 아뿔싸! 이번에도 또 다시 절차적 하자가 주요한 취소사유 중의 하나였던 게로군!

필자에게 성희롱 사건의 법률자문 또는 직접적인 조사참여 등을 위탁하는 공공기관이나 공공단체들의 경우에 거의 예외 없이 맨 처음에 꺼내는 말이 하나 있다. 전화를 걸어오는 담당자의 목소리부터 벌써 숨 가쁘다. “변호사님, 그런데요. 저희가 알기로는 사건을 20일 이내에 처리해야 한다고 하는데 지금 이미 며칠이 지나버려서 20일 이내에 완결할 수가 없는 상황이에요. 내일부터 바로 연이어서 절차 진행하면 20일 안에 끝낼 수 있기는 할 것 같은데, 변호사님도 내일부터 저희 기관에 계속 출장 나와 주실 수 있는 거지요? 큰일 났어요! 저희 좀 살려주세요!” 언제나 필자만 느긋하다. “20일 내 사건조사 완료에 관한 권고 때문에 그러시지요? 20일 내에 꼭 처리 완결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이게 무슨 소리냐고? 여성가족부가 성희롱 사건의 조사를 고충상담원이 신청서를 접수한 날부터 20일 이내에 완료하도록 권고하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는 정책적 차원의 권장사항인 것이지 법률상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관련 법령 어디에도 사건의 조사를 20일 이내에 마쳐야만 한다고 명시하고 있는 부분은 없다. 최근 새로 시행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의 경우에도 ‘20일 기한’과 관련된 조문은 없다.

더구나 일반적인 법령해석의 관행과 전례에 따를 때, 기간 관련 규정은 예외적으로 ‘불변기간’으로 정해져 있는 몇몇의 경우만 제외한다면 보통 ‘훈시규정’ 즉 최대한 존중함이 옳되 이를 준수하지 못하더라도 위법 또는 부당의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 조문으로 읽는다.

법률사항이 아니니 ‘위법’의 문제는 애초에 발생할 리가 없고, 기간 관련 규정은 ‘훈시규정’이니 이를 지키지 못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위법․부당의 문제가 생기기는 어렵다.

오해는 말자. 여성가족부가 권장하고 있는 ‘20일’ 규정은 성희롱 사건의 조사에 시간을 불필요하게 지체하지 말고, 피해자의 보호를 위해 최대한 신속하게 사무를 진행하라는 취지다. 법률사항이 아니며 훈시규정일 뿐이라는 말이, 그 내용을 함부로 무시해버려도 된다는 뜻이 될 수는 없다. 위와 같은 본래적인 의미를 잘 살려서 성희롱 사건의 조사와 처리에 만전을 기하여야 할 것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현장 실무자들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는 사건의 조사결과가 나오기 이전에도 피해자 보호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가 있다면 이를 임시적으로라도 취하는 데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절차 진행에 신속을 기하면서도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에게도 충분한 소명과 방어의 기회를 부여하여야만 한다는 것. 후자를 위해서는 일정한 방어준비 시간을 부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빠른 진행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면 후자를 간과해 버리기 십상이다.

성희롱임이 분명한 사안임에도 절차상의 하자로 말미암아 처분이 취소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때 피해자의 마음에 다시 생겨날 깊은 상처를 과연 어느 누가 쉽사리 치유할 수 있을까. 그러니 ‘20일’ 규정의 근본 취지는 잘 살리되, 문언 그 자체에만 매몰되어 정작 중요한 사항을 놓치는 우를 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박찬성 변호사
박찬성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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