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으로 읽는 그림책] 당신의 있는 그대로
[페미니즘으로 읽는 그림책] 당신의 있는 그대로
  • 윤정선
  • 승인 2019.11.23 08:00
  • 수정 2019-11-22 14: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페미니즘으로 읽는 그림책]
『느끼는 대로』
피터 레이놀즈 글·그림
@피터 레이놀즈
@피터 레이놀즈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우람하고 아름다운 건물들로 둘러싸인 공원에서 열린 사생대회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우리를 인솔한 선생님은 나의 그림을 마뜩지 않게 여겼다. 내가 공원 구석에 있는 화장실을 그렸기 때문이다. ‘왜 하필 하고 많은 것 중에서 화장실을 그려?’ 그 날 날 바라보던 선생님의 눈빛을 기억한다. 마치 날 외계에서 온 아이처럼 바라보는 듯한, 그런 시선이었다.

공원 구석에서, 나무들과 어우러져 있던, 하얀색 페인트칠을 한 화장실 건물은 이국적으로 보였다. 설명하기 전엔, 그 누구도 화장실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만큼, 공원의 화장실은 아주 낭만적인 풍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날 선생님의 날 선 말은 어린 내가 주눅 들기에 충분했다.

그림책 『느끼는 대로』의 레이먼도 어느 날 형의 비웃음을 듣는 순간, 그림 그리는 데 자신감이 없어진다. 레이먼의 그림을 훔쳐보던 형이 “도대체 뭘 그리고 있는 거냐?”며 말한 순간이었다. 그림을 그리던 레이먼은 이내 의기소침해지고 만다.

그 후 레이먼은 뭐든 ‘똑같이’ 그려보려고 애쓴다. 하지만 주위에 구겨버린 종이만 쌓여갈 뿐이었다. 그림 그리는 게 이렇게도 힘든 걸까? 어느 날 연필을 내던지고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는 레이먼. 그때였다. 레이먼을 지켜보고 있던 여동생 마리솔은 레이먼이 그리다가 버린 그림 하나를 들고 도망친다.

가뜩이나 화가 나는데, 자존심까지 상해 버린 레이먼은 동생을 뒤쫓다가 아주 놀라운 풍경들을 만난다. 그것은 바로 마리솔의 방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레이먼의 그림이었던 것! 그것도 레이먼이 망쳐버렸다고 구겨버린 그림들이었다. 더구나 동생은 그 그림 중에 하나를 가리키며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봐도 레이먼에게는 꽃병처럼 보이지 않는 그림을 보며 마리솔은 ‘꽃병의 느낌이 난다’며 오빠의 그림을 칭찬한다. 그 말에 힘을 얻은 레이먼은 그때부터 자신이 ‘느끼는 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레이먼이 여동생 마리솔에게서 용기를 얻고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이는 가부장제 남성 중심적인 시선을 넘어선 태곳적, 마고할미와 여신들이 지녔던 직관으로의 초대처럼 느껴진다. 가부장제에서 횡행할 수밖에 없는 서열에 기반한 수직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이제는 나와 깊이 접속된 수평적인 시선의 세상으로 가야 하지 않나? 그렇게 질문을 던지는 것만 같다.

@피터 레이놀즈
@피터 레이놀즈

 

페미니즘 강의에서 내가 늘 이야기하는 것도, ‘다르게 보는 시선’ 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대상화하는 시선에 포박된 채 부자유했던 여성들의 삶은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그 폭력적인 시선에 익숙해지기 위한 여성들의 견딤은, 또 오랫동안 억눌린 감정들로 치환되지 않았었나. 우울증과 화병이란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았었나.

그래서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이 옳은가? 과연 공기처럼 익숙한 가부장제 사회의 편견과 왜곡에 찬 시선은 아닌지, 질문해야 한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기보다, 그동안 굴절되어 있었던 세상의 시선을 바로 잡는 일일 것이다.

레이먼이 똑같이 그리지 않고 자신이 느끼는 대로 그렸을 때, 자유롭고 행복해졌듯이, 그림책 『느끼는 대로』는 서로를 다른 모습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하는 세상을 역설적으로 꿈꾸게 한다.

이제 레이먼은 느끼는 대로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는 진정한 즐거움을 만나게 된다. 여동생 마리솔 덕분에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된 것이다. 세상이 정한 룰에 들어가 똑같아지려 하지 않고, 자신의 느낌에 충실할수록 행복해진다.

레이먼처럼 우리도 느끼는 대로, 살아간다면, 세상이 무한히 확장되리라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책 『느끼는 대로』를 보다 보면, 삶이 반짝거리는 미지의 가능성으로 출렁이는 걸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먼지 수북한 스케치북을 펼칠지, 글을 쓰기 위해 공책을 꺼낼지, 그것은 당신의 몫.

마지막에 느끼는 대로 감정을 음미하며 뛰어가는 레이먼은 ‘자유’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것만 같다. 내 안의 감정을 가두지 않고, 그 흐름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은, 그것만으로 아름답다.

@피터 레이놀즈
@피터 레이놀즈

 

윤정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공연을 만들어 올리는 작가다. 독서치료사로서 10년 넘게 그림책 치유워크숍 활동을 해오고 있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바라보는 문화예술 비평 작업도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주요 저서로는 『조금 다르면 어때?』 『팝콘 먹는 페미니즘』외 다수.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여성신문은 1988년 창간 이후 여성 인권 신장과 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국내 최초, 세계 유일의 여성 이슈 주간 정론지 입니다.
여성신문은 여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여성인 '안전, 사회적 지위, 현명한 소비, 건강한 가족'의 영역에서 희망 콘텐츠를 발굴,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를 해주세요.
여러분의 후원은 여성신문이 앞으로도 이 땅의 여성을 위해 활동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여성신문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50 (3가 222번지) 골든브릿지빌딩 1층, 9층
  • 대표전화 : 02-318-93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신준철
  • 제호 : (주)여성신문사
  • 사업자등록번호 : 214-81-03304
  • 대표이사 : 김효선
  • 발행·편집인 : 김효선
  • 여성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9 여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admin@wome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