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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유영민>

“어차피 안 될 일이 아니었나 싶어요

여성이었던 점, 정치적인 점, 반 DJ정서 등…

종합적으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간 거죠”

떠들썩한 뉴스메이커가 된다는 것은 양가적인 기분이 들 게 할 것 같다. 한편으로 세상이 주목하고 알아준다는 것에 대한 성취감, 뿌듯함, 그리고 짜릿한 희열이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에선 속속들이 알려지고 평가받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낯설음, 더불어 억울함도 있을 것이다. 때로 그 비중이 후자에 집중되면서 ‘공인’이라는 브랜드를 달고 언론의 호기심거리로 던져지는 경우 차라리 뉴스메이커가 안 되었더라면… 땅을 치고 후회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까.

장상(63). 아마도 그 만큼 그 양가적인 감정의 극단을 오고갔던 사람도 없을 듯 하다.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총리 지명자. DJ정권 말기 대선까지 7개월 남짓한 기간을 남기고 발표된 그 어마어마한 뉴스는 한국사회를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여성계에서는 서둘러 여성총리 지명에 박수를 보냈고, 자리를 만들어 축하연을 벌이기까지 했다. 언론에서도 처음엔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국무총리’라는 거대 권력직에 붙은 ‘최초의 여성’이라는 타이틀은 그렇게 하기에 충분한 거리였다. 그리고 이어진 총리인준 인사 청문회. 장상의 표현대로 최소한 ‘그 여름의 돌풍’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진 그럭저럭 괜찮은 시나리오였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장상총리시나리오는 해피엔딩이 못 되었다. 총리인준 청문회가 일일홈드라마처럼 무리 없이 알콩달콩 넘어가리라는 예상은 아주 거칠게 빗나가며 추적60분꼴이 되었다. 장상은 학력위조자가 되기도 하고, 부동산투기꾼도 되고, 매국노가 되기도 했다. 그 해 여름 장상은 정말 ‘파렴치범’이 되어버렸다.

그냥 자기 자리에 가만히 있었으면 탁월한 학자이자 존경받는 교수로, 역량 있는 CEO총장으로서 무엇보다 그의 삶 자체가 검증의 과정이었고, 인준의 결과여서 한 줌 논란의 여지가 없었을 그의 안정된 아이덴티티는 상처받고 훼손되었다. 평생 장상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고 살았을 대한민국 국민 한사람 한사람에게까지 그 이름 두 자를 속속들이 각인시켜준 후에 청문회는 끝났다. 그리고 ‘돌풍’이 지나간 지 10개월이 되었다. 한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같은 표정으로 “많이 용감해지고 자유로워졌다”고 말하는 그를 지난 5월 27일 오전 모래내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본지와의 인터뷰 당일 새벽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남편 박준서교수(전 연세대 부총장)와 함께 ‘자랑스러운 동창상’을 받고 귀국했다는 그는 “시차가 적응 안 돼 땅인지 하늘인지 붕붕 떠 있는 느낌이다”며 말을 시작했다.

여성계에서 크게 밀어줬으면 어땠을까

“우선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1999년부터 수상자가 없다가 2003년에 우리 부부가 부부로서는 처음으로 수상을 해서 참 영광이었어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은 신학계에서는 명문 대학원이거든요. 청문회 때 학력 위조 얘기가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누가 나보고 미스코리아감이라고 하면 농담인 줄 알아듣겠는데….”

평안북도 용천 출생인 장상은 1947년 홀어머니와 월남 한 후 성장기 내내 피난민의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공부 하나는 ‘끝내주게’ 잘했다. 그 공부빽으로 숙명여고, 이화대학, 연세대를 내리 장학금으로 공부했고, 1960년대 후반 미국으로 떠나 10년 간 예일대,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 가난해서 고생스러웠지만 탁월한 성취를 이루어낸 매우 성공적인 사례에 속했다. 청문회 때 모 의원이 “그 시절 10년이나 유학을 했으니 얼마나 부유했겠냐”고 비아냥거릴 때 “존경하는 의원님, 남의 얘기라고 함부로 얘기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내 인생에 실례를 하고 있습니다”고 ‘속으로’만 분해했다고 한다.

이렇게 비유하면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장상에게 지난 여름 청문회는 ‘손대면 툭하고 터질 것 같은 그대’였다. 무엇을 주제로 얘기해도 결론은 “청문회는…”으로 났다. 그만큼 못한 말도 많고, 할 말도 많았다.

“정치논리로 희생된 부분이 있었지 않나 싶은데요.”

“어떤 의도에서 정치적인 희생양이었다는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청문회가 처음 도입되어서 미숙한 부분이 있었어요. 고위공직에 나가는 사람의 능력, 인격, 국정에 대한 비전을 검증하는 자리이고 합리적이고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과연 우리 사회가 청문회라는 제도를 제대로 활용했는가 하는 의문이 남아요.”

이어 땅투기 문제, 부동산 투기 문제, 그리고 아들의 국적문제까지 그의 상세한 해명이 있었다. 청문회에서 진행된 내용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해 장상의 제자들이 ‘장상 前 총리서리의 네 가지 의혹에 대한 진상’이라는 이름의 자료집을 통해 조목조목 짚었고, 최근 출간된 그의 자서전 <지금도 나는 꿈을 꾼다>(동아일보사)에서도 다시 한번 밝히고 있다.

장상 총리서리의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내심 들었던 생각은 정치권에 인맥이 너무 없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었다. 정치권에 힘이 없으니, 여성계라도 조직적인 힘을 줄 수는 없었을까.

청문회 한번 더 하면 잘 할 것

“여성계에서 나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면서 언론에 나오는 것을 액면 그대로 믿는구나, 내가 살아온 모습이 언론에 의해 바뀌어질 수도 있구나 그런 것을 느꼈어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도 내가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섭섭한 것 이상의 감정, 기가 찰 노릇이었어요. 사람들 말이 여성계가 좀 더 힘차게 한 목소리로 큰 소리를 냈으면 어땠을까 그러는데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안됐다고 보지는 않아요. 어차피 안될 일이 아니었나 싶어요.”

“어차피 안될 일이었다는 건 무슨 말씀이신지?”

“여성이었던 점, 정치적인 점, 반 DJ 정서 등이 그랬던 것 같아요. 종합적으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간 것이죠. 그리고 게임에 들어가려면 그 게임에 익숙해야 하는데 난 그렇지 못했고. 청문회 한번 더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공직에 미련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가정법에 답하지 않으렵니다. 가정법에 답했다가 얼마나 당했던지…”

“언론의 잘못된 보도에 대해 법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청문회 때 나에 대해 고약하게 쓴 언론에 내 친구가 찾아가 항의한 적이 있는데 ‘우리도 신문 팔아야 되지 않냐’고 해서 그냥 나왔다더군요. 법적으로 문제삼으면 수십 억 벌 거라고 농담 삼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근데 내 인생에서 그것을 위해서 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요. 그저 우리 언론이 더 성숙해지길 바래요. 후에 의원들 중에 우리가 지나쳤다고 말하고, 기자들 중에도 고약했다고 사과한 사람들도 있었고. 다음 번에 누가 그 자리에 나가면 나만큼은 안 당할 거예요. 여자들이 훨씬 많이 도와줄 것이고, 나라도 나서서 조언해 줄 테니까.”

은퇴한 후 구경만 하고 다니겠냐

정치판의 ‘돌풍’을 경험한 그이기에 최근의 정치상황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요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말이 많은데요?”

“새 대통령에게 많은 기대를 가졌고 3개월 만에 그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대통령은 4500만을 아우를 수 있어야 돼요. 총장 하면서도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해야 했거든요. 대통령은 반대하는 사람과도 대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젊은 페미니스트들 중에 박근혜 지지나 한나라당 입당 등 일부 여성들의 행보에 대해 ‘더러운 연대’라고 비판하는 이도 있는데…”

“나는 진보와 보수를 대립시키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해요. 보수적인 진보, 개혁적인 보수가 공존해요. 정당, 개인, 국민이 다 그렇죠. 둘 중 하나에 줄 서라 그러면 나 같은 사람은 줄 안 서요. 우리 사회는 이념이 너무 넘쳐나고 있어요. 현실을 직시해야 해요. 어디로 문제를 풀어야 되는지 양심 가진 사람들은 다 알아요. 이념 뒤에 현실이 있는 게 아니라 현실 속에 이념이 있어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지만 날아가는 새에겐 몸통도 필요한 법이다. 진취적이지만 혁명적이진 않으며, 좌우익의 어느 편이기보다는 중도에 서는 게 더 적성에 맞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장상은 그래서 “선생님은 파격이 없어서 심심하다”는 일부 ‘래디컬(?)’페미니스트 제자들의 핀잔도 달갑게 받는단다.

장상은 1년 간의 안식년을 마치고 오는 9월 학교로 돌아가 강의를 시작한다. 그리고 1년 반 후에 정년퇴임이다. 학교에서 나온 후 무얼 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매일 구경만 하고 살겠어요? 머리와 몸과 마음이 젊어요. 폭넓게 읽고 이해하고 말하고 쓰고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살 거예요.” 어쩐지 그 말이 “청문회 한번 더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앞의 말과 같은 지점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면 비약일까. 그런데 다시 한번 청문회장에서 장상을 보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원 뜻 그대로 들을 聽 들을 聞의 청문회가 된다면 말이다.

황오금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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