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할 권리(하)

<여성신문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나눔터>를 통해 공개된 [생존자의 목소리]를 매주 전재합니다. 이 코너는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로서 아픔과 치유 과정을 직접 쓴 에세이, 시 등 다양한 글을 전합니다.> (편집자주) 

페르세우스 유성우란 / 2013년 8월 12일 새벽 강원 영월군 별마로천문대에서 바라본 하늘에 페르세우스 유성우가 관측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뉴시스·여성신문

 

그래서 나는 마음 속으로는 따듯한 느낌을 갈망하지만 겉으로는 상처받기 무서워 가시를 한껏 돋친 고슴도치 같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들은 게 폭언이라 내 말의 온도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강해서 타인에게 상처도 많이 주었다. 열림터 할동가분들께 “왜 저한테 잘해주시냐”고 물었다. 웃기지만, 정말로 나에게 뭔가를 바라는 행동이라고 나는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누군가 나를 좋아해준다는 것이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집에서는 항상 나를 나쁜년이라고만 했는데, 열림터에서는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 반발감에 되려 활동가들의 마음을 거부했다. 내 모든 세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가능한 엄마의 진심 어린 사과와 이제라도 받고 싶은 엄마의 조건 없는 따듯한 사랑을 포기하고 내려놓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열림터에서의 첫 생일날, 나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축하받고 싶지 않다며 펑펑 울었다. 열림터 식구들은 태어나줘서 고맙다면서 나와 같이 울어주었다. 태어나서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는데, 그 순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동안 꽁꽁 얼었던 마음이 깨지는 소리. 그리고 그제서야, 내 마음에 상처받은 어린 아이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 안아줬으면 하는, 너무 너무 사랑 받고 싶은 아이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엄마는 물론 내게 의식주를 제공하고 좋은 학원에 보내줬지만 정말 내가 바란 사랑은 그게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본인의 취향에 맞는 옷을 나에게 사주는 게 엄마의 사랑이었다. 상담 선생님은 그건 올바른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엄마의 사랑만큼은 아니겠지만, 열림터에서의 올바른 사랑으로 마음을 채워가자고 하셨다. 그래서 웃기지만 성인인 나는 아기처럼, 걸음마를 배우듯 열림터 활동가들께, 상담 선생님께 마음을 열고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배웠다. 힘들다고 투정도 부려보고, 고민이 있을 땐 털어놓기도 하고, 어리광도 부렸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 중에서도 가장 힘든 건 바로 내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모두들 나를 채근하지 않고 차근차근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아무 감정도 없이 무채색 영화였던 내 삶이 열림터에 입소한 이후로 조금씩 수채화로 물들어갔다.

퇴소를 준비할 무렵, 나는 한 번 더 행동할 용기를 냈다. 비로 아빠를 만나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 아빠에게 연락을 했다. 가족 아무에게도 나를 만난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근 일 년 만에 아빠를 만났다. 내가 집을 나간 이후 유일하게 나를 찾으려고 실종신고까지 한 아빠. 나는 아빠에게만은 내 모든 걸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이십여 년간 참아온 울음을 꾹꾹 삼키며 어느 카페에서 아빠를 만나 엄마의 이야기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아빠는 오빠의 가해 사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엄마의 학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고 했다. 아빠는 울면서 그동안 무심하고 방관했던 자신을 인정했고, 미안하다고 내게 사과했다. 나는 엄마의 장례식장에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했고, 아빠는 이해한다고 말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가족에게 내 피해 사실에 대해 진심으로 인정받고 사과받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내 상처가 조금은 옅어졌다.

그 뒤 나는 열림터를 퇴소해 무사히 보금자리를 틀었고, 나만의 공간에서 삶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사과는 받았지만 그후로 나는 더 이상 아빠와 연락하지 않았다. 정신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즈음, 세상이 미투 운동으로 시끌벅적해졌고 몇 주 내내 버스에서, 인터넷에서 각종 미투 관련 기사들이 쏟아졌다. 나는 가족이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들이 이런 뉴스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달라진 나와, 그리고 달라진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미투 운동을 보면서 이런 사실들이 더 많이 공론화되기를, 그래서 그들이 더 많이 불편하기를 바랬다. 그 뉴스들을 볼 때마다 나를 떠올리기를, 이제는 그 뉴스들을 보면서 ‘지겹다’고 이야기하지 않기를.

문을 열어놓아도 괜찮은, 마음이 편안한 내 집에서 몇 년간의 내 선택과 행동들을 떠올려본다. 엄마의 마지막 폭언을 듣고 나는 집을 나왔고, 엄마는 집을 나간 나를 찾지 않았다. 2017년 2월, 고생 끝에 감사하게도 열림터에 입소했고, 내 행동할 권리를 행사한 결과로 박근혜는 탄핵됐다. 다시 한 번 뉴스가 대통령 선거로 시끌벅적하게 돌아갔고, 나는 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내가 적임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 나는 통일이 한층 가까워진 가슴 벅찬 뉴스를 봤다. 지금 나는 내가 선택한 세상 속에서 예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촛불 시위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상담센터를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집을 나오지 않았더라면, 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엄마나, 아빠나, 오빠와 같이 행동하지 않는 그 가족 안에 그대로 갇혀 살았을 것이다. 나는 내 가족을 선택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20여 년을 외롭게 슬퍼하고 분노하며 살았다. 내게 주어진 환경은 선택하지 못했지만, 나는 스스로 행동함으로써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행동할 권리가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행동일지 몰라도 나처럼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 행동이 인해 상처받은 내 마음 속 작은 아이를 위로하고 내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반드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나는 행동하며 이 모든 순간들을 살아갈 것이다. 내 모든 선택의 결과가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틀렸을 수도 있다. 그래도, 적어도 우리모두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행동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지만, 누군가 지금 내 글을 읽고, 혹시라도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꼭 반드시 행동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이 세상 어딘가엔 내 선택을 지지해주고, 같이 울어주고, 내 말을 믿어주고, 가족보다 더 나를 아껴줄 사람들이 꼭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너무 너무 행복하니까. 내가 선택한 삶이기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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