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게 재개발이 진행 중인 서울 종로구 사직동 한가운데 사는 시인 조은은 ‘사직동 캣맘’으로 불린다. 우연히 함께 살게 된 고양이들과 동네를 떠도는 고양이들을 수년 째 ‘모시는’ 그가 사직동 터줏대감 고양이들과 고양이라는 필터를 통해 본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편집자주)]

재건축이 한창인 경기 남양주시 호평동 진주아파트에 사는 고양이들. ©다스름82
재건축이 한창인 경기 남양주시 호평동 진주아파트에 사는 고양이들. ©다스름82

18년 가까이 같이 살던 개가 죽었을 때, 무지하게 슬펐다. 한편 홀가분하기도 했다.

같이 살던 개는 사람으로 치면 심한 트라우마가 있어 사람의 손길을 푸줏간 칼보다 무서워했다. 원래는 내가 세 들어 살던 주인집에서 기르던 녀석이었는데, 이삿짐을 다 실은 트럭을 절망적으로 바라보던 눈빛이 너무도 불쌍해 장물아비가 될 각오로 나는 녀석을 품에 안았다. 환경이 바뀌면 금방 회복될 줄 알았던 녀석은 죽기 사흘 전까지도 도와주려고 내미는 내 손을 물었다. 그 개와 같이 사는 동안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쳤구나!” “이런 개를 집안에 두는 네가 더 환자다!”라는 말을 들어야만 했다.

개는 2012년 단오를 이틀 앞두고 죽었다. 그리고 넉 달이 흘렀다. 딱 이맘 때였다. 당장 출산할 것 같은 만삭의 노란 고양이가 지붕을 타고 우리 집 마당으로 내려왔다. 녀석의 눈 밑은 푹 젖어 있었고, 옅은 초록빛이 도는 눈에는 애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때 나는 남미나 동유럽의 레지던스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병든 개와 사는 동안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떠날 수 있는 시점이었다.

터질 듯 배가 부푼 고양이는 서너 시간 마당에서 버티다가 저녁 무렵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녀석도 그 좁은 한옥 마당에서는 몸을 풀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녀석이 사라지자 한동안 가슴이 묵직했다. 곧 이십여 년 만에 얻은 자유로움에 실금 하나 가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뒤따랐다. 그렇게 떠난 줄 알았던 고양이는 마당에 있는 화장실 서까래 아래서 조용히 몸을 풀었다.

25년 동안 재개발을 추진해온 광화문 근처의 우리 동네를 빙 둘러싸고 언제부턴가 거대한 이름의 건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경희궁의 아침, 파크팰리스, 스페이스본, 광화문시대, 용비어천가, 경희궁자이 등등. 이름만으로 경제적 가치를 짐작하게 하는 고층빌딩이 들어선 그 땅에서 고양이들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바로 옆 우리 동네로 끝없이 흘러들었다. 질병과 독살, 교통사고와 굶주림으로 수없이 죽어 나가도 고양이는 골목마다 눈에 띌 정도로 넘쳤다. 그 동안 고양이가 우리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비록 늙고 병들었을망정 개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해 한글날 첫 출산에서 딱 한 마리만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새끼 역시 어미를 닮아 옅은 초록빛 눈을 가졌고,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내 눈에도 어려서 그런지 깜찍하고 귀여워 보였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나는 새끼고양이를 수컷이라 믿었다. 어린 그 녀석은 순진무구하게 뛰놀며 마당으로 내려와 사료를 먹고 화장실을 쓰면서 시시각각 자랐다.

2013년 3월 23일엔 어미가 또 몸을 풀었다. 어느덧 청소년 고양이가 된 나의 2호 고양이는 어미를 도와 육아를 했는데,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동생들을 지켜보며 지붕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돌보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 무렵 캐나다에 사는 친구가 우리 집에 와 하룻밤 잔 적이 있었다. 그 친구가 아침에 찻잔을 들고 마당을 내다보며 말했다. “작은 고양이가 새끼를 가진 것 같아요” 나는 깔깔 웃었다. “날마다 엄마 간식을 가로채 먹어서 그래요.” 하루가 다르게 비만해지는 2호 고양이에게 그 어미가 간식을 빼앗기지 않도록 날마다 신경을 쓰던 참이었다.

친구가 떠난 다음날인 2013년 4월 24일, 우리 집 2호 고양이가 지붕 위 박스 안에서 사투를 하고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동물보호단체에 도움을 청했다. 지붕으로 올라갔던 봉사자가 두 손에 담긴 솔방울만한 꼬물이들을 눈앞으로 내밀었을 때 내 입에서는 헉, 하는 소리가 났다. 아기고양이는 암컷이었고, 살이 찐 게 아니라 임신을 한 것이었으며, 어린 소녀 냥의 출산이었다.

여섯 달여 만에 한 마리의 고양이가 아홉 마리로 늘어났다. 나는 할 수 없이 벌벌 떨며 동물보호단체에서 두고 간 포획틀을 집어 들었고, 하나하나 중성화수술을 시키기 시작했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그 골목에 동물을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노인이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정신병원에 장기 입원해 있던 노인을 잠깐 퇴원시켰던 부인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는 골목 사람들에게 안전핀 뽑힌 수류탄 같은 존재였다. 칠십이 넘었음에도 그는 배기량이 큰 오토바이를 몰고 춘천을 오갈만큼 힘이 장사였고, 낮에도 밤에도 술에 취한 채 깨어 있었다. 그를 이기기 위해선 악마처럼 힘이 세거나 하나 뿐인 목숨을 걸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가 음식물에 섞어 살포한 독약을 먹고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고양이들이 가장 먼저 죽어나갔다. 그러자 빈집들 대문 아래로 빽빽 우는 새끼고양이들이 수도 없이 기어 나왔다. 어미 없는 공포와 굶주림에 겨워 우는 새끼들이 자기 집 대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높이 쳐드는 삽날에 혼비백산한 나는 비명을 질렀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대형 캣맘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나는 오십 마리쯤 되는 고양이를 분양했다. 뜻하지 않은 일이었다. 수많은 병원비를 썼으며, 가여운 생명들을 살리기 위해 내가 지닌 유전자의 힘을 능가하는 노력을 했다. 27kg짜리 고양이 사료 포대를 번쩍번쩍 져 나르는 내 모습에 친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인생총량의 법칙이 있다더니, 그 동안 나태하게 살았던 삶이 고양이를 통해 소급되고 있었다. 눈비에도 아랑곳없이 비슷한 시간에 동네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다니기 때문에 나는 기억에도 없는 사람들이 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끔찍한가! 지금껏 본업을 숨기며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아왔건만.

열악한 신체조건이 그대로 드러나는 허름한 차림으로 고양이에게 밥이나 주고 다니기 때문에 모두들 만만하게 보는 나는, 우아한 지인들과 예기치 않게 마주칠 때마다 이를 악물고 마음을 진정시킨다. 어중간하게 아는 사람이 “조은 선생님 아니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아니에요!”라고 시치미를 떼곤 한다. “세상에… 아니란다…” 하는 말을 등 뒤로 들으며 얼굴이 화끈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고양이라는 필터를 통해 사람들을 본 뒤부터 그들에 대한 신뢰도는 과거에 비해 턱없이 낮아졌다. 하지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기 때문에 이젠 더 이상 사람들에게 실망하지 않는 반면, 작은 일에도 쉽게 감동한다. 이 엄청난 아이러니가 날마다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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