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돌 판매길 연 대법원 판결에
분노한 여성 650명 거리로 나서

28일 서울 중구 청계광장남로에서 리얼돌 허용 규탄 시위가 열렸다.
9월 28일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리얼돌 수입 허용 판결 규탄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곽성경 사진기자

 

9월 28일, 650여명의 여성이 청계천로에 모여 리얼돌 전면 금지를 촉구했다. 대법원이 리얼돌 수입을 허용한 지 3달만이다. 정부는 리얼돌을 반대하는 26만 명의 청원에 미온적으로 대처했고 공권력 전반은 여성의 권리에 무감각했다. 이 나라가 '여성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다시 자명해졌다. 더 이상 여성의 존엄성보다 남성의 성적 권리가 우선하는 사회를 견딜 수 없었던 여성들은 거리로 나왔다. 익명의 개인들이 모여 시위를 조직했고, SNS를 통해 소식을 접한 여성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평범한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주말을 할애해 지난 토요일 170여분 간 구호를 외쳤다.

“수동적인 가짜 여자 그 다음은 누구겠냐”
“도태 남성 성욕 배출 여권보다 중요하냐”
“이 세상은 남성들의 성적 욕구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우리 여성은 남자 따위의 성기구가 아니다”
(9월 28일 리얼돌 수입 허용 판결 규탄 시위 구호문 中)

지난 6월 대법원은 리얼돌 수입을 허용했다. 인천 세관에서는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리얼돌 통관을 보류했고 1심 재판부는 “리얼돌이 실제 여성의 신체 부위와 비슷하게 형상화되어 있고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왜곡하였다고 평가할 정도로 특정 성적 부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며 수입을 제한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리얼돌을 ‘성기구’라고 지칭하며 “국민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최소화돼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대법원은 이러한 2심 판결을 채택해 리얼돌 업체의 손을 들어줬다. 여성의 인간 존엄성보다 남성의 성욕 해소의 자유를 우선시하며 남성성의 폐단을 반복했다. 리얼돌이 상징하는 구조적 여성혐오를 외면한 채 남성의 성적 자유를 여성의 인간 존엄성보다 앞세운 이번 판결은 실상 공권력이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를 공식적으로 용인했음을, 한국 사회가 남성 중심 사회임을 공표한 것이나 다름 없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리얼돌 수입 및 판매를 금지해주세요”라는 국민청원이 올라왔고 26만명의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정부는 낙태죄 폐지와 각종 여성혐오 범죄 등 여성 의제에 그래왔듯 미진한 답변을 내놓았다. 여성들의 절박한 비명은 다시 무력해졌다. 리얼돌은 커스터마이징, 아동 성 상품화 등 어느 측면에서도 규제 받지 않고 성황리에 판매되고 있다. 정부는 규제하겠다는 입장을 말로만 내놓고, 적절한 법규를 마련하지 않은 채 여성 인권의 추락을 방관하고 있다.

28일 서울 중구 청계광장남로에서 리얼돌 허용 규탄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여성용리얼돌리러링 퍼퍼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9월 28일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리얼돌 수입 허용 판결 규탄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남성 신체를 본뜬 성인용품을 판매하는 상황을 연출하며 ‘미러링’ 퍼포먼스를 펄쳤다. ©곽성경 사진기자

 

대법원이 리얼돌 수입 허용 판결을 내리고, 리얼돌의 수요가 급증하기까지 한국 사회를 지켜보며 여실히 깨달았다. 이 나라 여성은 남성의 성적 도구로 무자비하게 소비되고 있다. 남성의 성욕을 내세운 무심하고 폭력적인 논리로 여성의 인간 존엄성이 훼손당하고 있다. 지금껏 여성에게 인형이 되길 요구했던 한국 사회는 드디어 ‘시끄럽게 권리를 외치는 여성’ 대신 ‘수동적으로 남성의 성욕을 받아낼’ 인형을 만들었다. 리얼돌을 찬성하는 일각에서는 인형을 통해 성범죄를 줄일 수 있다며 남성의 성욕을 ‘풀어줘야 할 자연스러운 욕구’로 인정해주고 있다. 한국 사회가 남성에 의한 여성 압제를 아무렇지 않게 계승하는 논리 그대로다.

여성들에게 리얼돌은 그저 ‘인형’ 혹은 ‘무해한 성기구’로 보이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유구한 여성 성 착취 역사를 알고 있다면, 리얼돌을 그저 ‘인형’으로 일축할 수 없다. 리얼돌은 여성의 신체를 상품화할 뿐 아니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여성의 성기로’ 자위를 하려는 남성 전유 강간 판타지의 전형이다. 여성들은 남성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무분별한 성적 대상화 및 사물화를 더 이상 좌시하지 않고 목소리 내기 위해 청계천로에 모였다. 여성 신체 껍데기를 갖고 ‘더 실감나는 자위 행위를 할 자유’ 따위 허락하지 않을 것이며 성 착취 문화를 종결시키고자 한다.

지난 토요일 생존권을 위해 절박히 외치는 여성들을 남성들은 구경거리마냥 바라봤고, 비웃었으며 불법 촬영까지 서슴지 않았다. 시위 관련 기사 댓글 역시 ‘질투하는 거냐’, ‘이제는 인형한테까지 인권을 들이댄다’는 남성들의 조롱으로 얼룩졌다. 여성 신체를 물화하는 리얼돌에 아무런 문제 의식을 갖지 못한 채, 무지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남성들의 태도에서 대한민국 여권의 현주소가 드러난다. 대법원의 판결과 청와대의 답변이 나온 사회적 맥락이 투명하게 보인다.

시위를 주최한 ‘리얼돌OUT’은 다음 시위를 기약하며 이 싸움을 지속할 것을 여성들과 약속한다. 여성을 2등 시민으로 여기는 대법원의 판결과 정부의 방만한 대처를 강력하게 규탄한다. 여성의 신체로 성욕을 해소하겠다는 남성 젠더 권력의 오만. 남성의 성욕은 더럽더라도 마땅히 풀어줘야 한다는 무식한 발상. 이것이 리얼돌의 핵심이다. 여성은 주권자로서 명한다. 대한민국은 리얼돌을 전면 금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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