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으로 읽는 그림책] 경력단절 늑대 L은 다시 숲 속을 누빌 수 있을까
[페미니즘으로 읽는 그림책] 경력단절 늑대 L은 다시 숲 속을 누빌 수 있을까
  • 윤정선
  • 승인 2019.09.22 08:00
  • 수정 2019-09-22 12: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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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으로 읽는 그림책]
『L부인과의 인터뷰』
홍지혜 글·그림
『L부인과의 인터뷰』 ⓒ 홍지혜
『L부인과의 인터뷰』 ⓒ 홍지혜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그냥 L 부인이라고 불러주세요.”

『L부인과의 인터뷰』는 한 전업주부 여성을 인터뷰하는 형식의 그림책이다. 이름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압축해서 보여준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이 첫 질문과 대답은 의미심장하다. 결혼과 육아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 버린 나머지, 익명성의 이니셜 뒤에 숨고 싶은 L부인의 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날마다 집안 청소를 하며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공과금 고지서를 어디에 두었지? 청소기를 어디에 두었지? 처음엔 분주한 집안일 탓에 깜빡깜빡, 뭔가를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그림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우리는 알게 된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찾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그런데 그녀가 늑대라는 사실이 눈에 띈다. 치마를 입고 앞치마를 둘렀지만 L부인의 모습은 분명 늑대. 그렇다, 그녀는 한 때 야생의 숲속을 누비던 잘 나가는 사냥꾼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자신 안의 야생성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L부인이 청소를 하면서 늘 불안하고도 황망하게 찾고 있는 것은, 바로 숲속에 살았던 야생의 자아, 진짜 자기 모습이었던 것이다.

결혼, 임신 및 출산, 육아, 자녀 교육, 가족 돌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기혼 여성을 일러 경력단절 여성이라고 부른다. 그림책 『L부인과의 인터뷰』는 경력단절 여성들에게 단절된 것이 단지 사회적인 경력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각적이고도 명료한 그림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이 책의 작가는 L부인의 이야기를 그리며 자신의 본모습에 대해, 진짜 나는 누구인가? 끊임없이 자문을 했다고 한다.

그림책을 보며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에 가다』의 주인공 수전이 떠오른 것은, 그래서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전업주부인 수전은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가정에서 행복하고도 평화롭게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족을 벗어나 자신만의 공간에 간절히 혼자 있고 싶어서 런던 교외에 있는 호텔을 혼자 찾는다. 그곳에서 그녀가 하는 일은 그저 조용히 몇 시간을 앉아 있다 오는 것. 호텔의 19호실에서 수전은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비로소 가질 수 있다. 아무 일 없이 평화로워만 보이는 수전의 가정 이면에, ‘나’를 포기한 여성의 희생이 숨어 있음을 통렬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L부인과의 인터뷰』 ⓒ 홍지혜
『L부인과의 인터뷰』 ⓒ 홍지혜

 

그림책 『L 부인과의 인터뷰』의 늑대 부인에게도 그러한 공간이 절실하게 필요해 보인다. 날마다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집 안에서의 똑같은 시간은 ‘나’를 끊임없이 소모시키는 일일뿐, 숲 속에서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고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살아갔던 늑대로서의 삶은 찾아보기 힘들다.

심리분석학자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야생동물인 늑대와 여걸(女傑)이 둘 다 멸종 위기에 처했다고 이야기한다. 야성을 잃어버린 여성을 멸종 위기에 처한 늑대와도 같다고 주장하는데, 그녀는 여성 안에 본래부터 있던 ‘늑대 어머니 원형’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잃어버린 야성적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늑대는 여전히 세상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채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으로 살아가지만, 여성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야성적인 본능을 잃은 채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덕분에 늑대 어머니 원형인 야성적인 본능을 잃어버린 여성들은 삶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잘못된 선택을 하기 쉬웠다. 본래 타고난 예민한 감각이 무디어졌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오랫동안 내가 아닌 다른 옷을 입으며 살아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사람의 모습을 한 여성)을 향해 ‘찾았다’고 외치며 활을 겨누는 늑대 부인은, 그래서 진짜 나와, 가부장제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 사이의 분열을 보여준다. 늑대 부인 역시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스스로 분열하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터.

결국 거울은 산산조각 깨지고 늑대부인은 전쟁의 파편처럼 흩어진 거울조각을 밟고 깨진 거울 속 세상으로 들어간다. 이제까지 ‘나’라고 생각했던 허상을 깨뜨리는 참으로 상징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림책의 마지막에 L 부인이 옷을 벗고 온전한 늑대가 되어 숲에서 다른 늑대들과 뛰어노는 장면 또한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진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늑대 부인처럼 직면해야 함을 보여주는 그림책 『L부인과의 인터뷰』는, 아프지만, 거짓 자기를 직면했을 때 여성들 안의 야생적인 자아를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윤정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공연을 만들어 올리는 작가다. 독서치료사로서 10년 넘게 그림책 치유워크숍 활동을 해오고 있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바라보는 문화예술 비평 작업도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주요 저서로는 『조금 다르면 어때?』 『팝콘 먹는 페미니즘』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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