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성인 ‘내’가 읽은 『82년생 김지영』

2월 19일 도쿄 신주쿠 기노쿠니야 서점에서 열린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작가와의 토크쇼에 참석한 일본 팬들. ⓒ뉴시스·여성신문
2월 19일 도쿄 신주쿠 기노쿠니야 서점에서 열린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작가와의 토크쇼에 참석한 일본 팬들. ⓒ뉴시스·여성신문

 

『82년생 김지영』은 2018년 12월 도서출판 지쿠마서방에서 번역 간행되었다. 일본 주요 서점에서 문예 부문 판매 1위를 일제히 획득, 발행 2일째에는 중판, 4일째에는 3판, 4일째에는 4판 중판 발행이 결정되었고, 2019년 5월까지 누적 발행량은 13만부에 이른다.

최근 1년간 일본에서는 ‘성차별’보다는 ‘성별에 따른 비리와 부조리’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 넘쳐나고 있다. 예를 들면, 재무성 차관, 문예평론가, 저널리스트, 초중고 교원에 의한 성희롱 및 직장 내 괴롭힘, 성폭력, 취직활동 중 성희롱, 동경대 의대 등에서의 입시 점수 차별, “(성관계) 가지기 쉬운 여대 랭킹”과 같은 주간지 기사, 성폭력 무죄 판결 및 피해자 힐난하기와 같은 사법처리, 여성의원 또는 여성 사회활동가에게 속옷을 착불로 보내기 등의 피해이다.

비록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지만 이 사건들이 대중매체에 보도된 것만으로도 다행일지도 모른다. 애써 외면하고 싶은 일본사회의 성별을 둘러싼 차별 및 폭력 등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한국이라는 다른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허구적 이야기를 읽을 만한 여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현실세계 곳곳에서 『82년생 김지영』 표지를 마주치게 되면서, 이는 ‘지금 읽는 게 괜찮겠다’는 일종의 사인이라고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책은 일본에서 출판되자마자 주요 신문, 잡지, 뉴스 등 온갖 매체에서 거론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책 소개나 문학적 의의를 찾는데 그치지 않고 책을 통해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일본사회를 성찰하고 그 사회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그런 상황을 되물어야 한다고 주장한 기사가 적지 않았던 점이다.

출판사 지쿠마서방의 책 관련 사이트에는 1954~1999년 사이 출생한 독자 100명의 소리가 게재되어 있다. 세대는 다르지만 김지영의 이야기에서 자신과 어머니, 딸이 과거에 받았거나 앞으로 받아야만 할 경험, 감정 등이 담겨있는 것에 놀라 책을 지인에게 추천하고 싶다거나 책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다는 여성 독자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자신 안에 있는 김지영과 같은 이야기를 말하고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인가”를 가시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여성들은 그 무엇인가를 일본에 만연한 가부장제, 성차별주의 남존여비라고 표현한다.

많지는 않으나, 남성 독자들도 책에 대한 감상을 표현하고 있다. 해외 문학작품으로 극찬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어머니를 회상하거나 여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자신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되돌아 보게 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김지영의 이야기는 일본 여성들에게 있는 ‘사토유코(佐藤裕子: 일본에서 가장 흔한 성씨로 82년 당시 여아에게 인기가 있었던 이름)’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지만, 책에서 익명으로 등장하는 한국 남성들처럼 일본 남성들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김지영과 사토유코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듯 했다.

책을 통해, 말해본 적 없는 일본 남성은 이름 없는 한국 남성과 어디쯤에선가 만나게 될 것인가? 아니면, ‘82년생 사토 다이스케(佐藤大輔: 당시 남아에게 인기가 있었던 이름)’의 이야기를 찾아서, 강을 건너, 김지영과 사토유코의 이야기에 뒤섞일 것인가?

『82년생 김지영』 일본어판 ⓒ일본 아마존 갈무리
『82년생 김지영』 일본어판 표지

 

세대·국경 넘은 외침
“나는 김지영이다”

나도 다른 독자들처럼 김지영의 이야기에서 예전에 경험했던 일이나 머릿속에 맴도는 말, 그때 느꼈던 감정 등이 강렬하게 떠올랐다. 지방 출신인 내가 도쿄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을 때 부모님은 주위로부터 “외동딸인데도, 도쿄에 가게 돼 기특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익숙치 않은 하이힐에 화장, 신입사원용 정장을 마지못해 입고 간 한 기업 면접에서는 “당신은 외동딸인데 고향으로 돌아가서 일을 찾아도 되지 않나요?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아요?”라고 면접관이 괜스레 걱정해 준 적도 있었다. 대학원에서 페미니즘을 연구하려고 결정했을 때 교수로부터는 “외동딸이니 적당히 해야 한다”라는 말도 들었다. 임신 했을 때는 어떻게 연구나 일을 계속할까 고민하면서 이 책의 한 에피소드처럼 남편의 “협력해준다”라는 말투나 서로가 “잃을 것들”을 둘러싸고 크게 다툰 적도 있다. 출산 후에는 가족 모두에게 내 이름이 아닌 “(아이의) 엄마”라고 불리게 되어서 속으로는 기분이 언짢았다. 직장에 복귀하기 위해 6개월 된 딸을 보육원에 맡길 때는, 친정 어머니에게 “그렇게 어릴 때부터 (보육원에) 맡기니 불쌍하다”는 말을 몇 차례나 들어야 했다. 그리고 “자연분만 신화”, “모유수유 신화”, “세살 아이 신화”라고 하는 출산, 육아를 둘러싼 여러 신화들. ‘엄마’, ‘아내’, ‘딸’, 그리고 ‘여자’라 불리우는 나라는 존재를 속박하는 모든 기호를 잡아당겨 떼어내면 야생마처럼 황야를 뛰쳐나와 행방을 알지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럴 때마다 김지영의 어머니처럼 나를 질타하고 격려해주는 존재는 페미니즘과 그것을 통해 만나게 된 사람들이었다.

저자 조남주씨와 대담했던 가와카미 미에코씨는 책이 남성(정신과 의사)의 시선에서 그려진 까닭에, “카탈로그화된 여성의 생애”라고 언급했으며 조 작가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에피소드들을 모아 현대 여성의 인생에 대해 일체의 왜곡, 비하, 비난을 배제하고 쓰고 싶었다고 했다. 또한 “당신이 능력과 자질이 없었기 때문”이라든가 “당신이 지나치게 민감하기 때문”이라면서 내쳐지지 않도록, 한국의 사회구조를 나타내는 통계나 기사 등은 주인공이 겪은 에피소드에 대한 공감대를 높여줬고, 그렇기 때문에 세대, 국경을 넘어 독자들이 “나는 김지영이다”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일본에서 이 책이 크게 주목 받은 배경에는 현재진행형의 성차별, 성폭력 사건들이 사회에 누적되어 한국만큼은 아닐지라도 미투 운동 등의 이의 제기가 길거리나 SNS를 통해 행해지던 사회환경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성별에 따른 억압이나 폭력, 불공정한 성별역할분업 등의 문제를 깊숙이 파헤치며 여성 삶의 어려움이나 고통을 담은 소설, 만화, 드라마가 일본에 이미 많이 발표됐다. 여성학, 페미니즘에 관한 서적 역시 수많은데도 어째서 『82년생 김지영』은 이토록 화제가 되었던 것일까?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책을 읽고 1970년대 페미니즘 제2의 물결 당시 사용된 유명한 슬로건이 떠올랐다. 『82년생 김지영』은 바로 이 슬로건을 구현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책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전부 페미니즘에 관한 것으로 지금까지 계속 질문해왔던 것이 아니었던가? 2019년 『82년생 김지영』이 일본 독자에게 “이것은 내 이야기다”라고 느껴지게 했던 데에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즘 슬로건이 나타난 지 약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런 관점이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직까지도 ‘나의 목소리’나 ‘나의 경험’을 꺼내거나 받아들이는 것을 과소평가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무려 50년이다.

게다가 객관적 데이터로 뒷받침된 한국이라는 “가깝고도 먼” 나라를 무대로 한, “보통”의 한국 여성에 대한 이야기인 까닭에 일본에서 일본어로 읽는 우리들과는 거리가 있고, 결국 “한국 여성은 힘들구나”라고 할 수 있는 핑계거리도 있다. 일본 독자들은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지도, 위협받지도 않는 구도에서 고작 “이것은 내 이야기다” 정도로 말했던 것은 아닐는지. ‘82년생 사토유코’였다면, 이 정도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아닐까? 심술궂은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똑같은 여자’는 없다, 그러나
서로를 잇는 다리가 되어…

우리들은 국적, 계급, 계층, 세대, 인종, 민족성, 성적 지향 등을 축으로 구분되어 불행히도 그 구분 속에서 서로를 적대시하곤 한다. 한 예로, 일본 오차노미즈 여대가 국립대 최초로 2020년 4월부터 트랜스젠더(MTF) 학생의 입학을 허용할 것임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인터넷이나 페미니즘계에서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를 둘러싸고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차별적, 배타적인 발언이 대량 유포되는 사태가 발생해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배타성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외에 내가 페미니즘을 통해 배운 것은 어느 한 명도 ‘똑같은 여자’가 없다는 것이다. 경험의 공감대를 형성해 단절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각각의 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예민하게 수용해 서로의 경험을 말하고 받아들인 후 “연대하는 것”. 일본에서 일본 국적을 갖고 일본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나는, 나 자신을 몇 번이고 김지영에 투영하곤 했다. 물론 일본에 사는 나와 한국에 사는 ‘당신’의 사이에는 공유되지 않는 상황도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일본은 식민지 시대를 경험하지 않았으며, 징병제는 현재 존재하지 않고, 민주화 운동이라는 강렬한 기억이 없으며, 아직도 부부는 각자의 성을 사용하지 않으며, 천황제를 포기하지 않고 새 연호인 ‘레이와(令和) 열풍’에 빠져있다. 또한 같은 사회에서 살고 있다 할지라도 김지영에게도 사토유코에게도 받아들이지 못할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우리들로서는 서로의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서로를 잇는 다리가 되어 그 다리 위에서 “강”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같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연대에 대한 본연의 의미를 내게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다. 일본과 한국 모두 성별 격차지수 순위나 성차별적 상황을 나타내는 국가별 통계에서 대체로 ‘사이 좋게’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국에서 진솔한 여성으로 묘사된 김지영의 이야기처럼, 만약 일본에서 사토유코의 이야기가 흘러 나온다면 당신은 그것을 읽을 것인가? 한국에서 사토유코는 어떻게 받아질 것인가? 우리 사이에 펼쳐진 두 개의 이름이 갈등의 바다를 넘어 ‘82년생 김지영’, ‘82년생 사토유코’ 그리고 거기서부터 넘치듯이 밀려오는 나와 당신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 싶다. 그것은 언젠가는 서로를 짓누르는 가부장제나 성 비대칭이라는 사회구조를 안에서부터 깨부수는 힘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이 글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젠더리뷰」 2019년 여름호 게재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필자 오노 세라
독립행정법인 일본학술진흥회 특별연구원. 일본입국관리정책의 성별 분석과 이주여성 지원에 관한 일본 시민운동의 역사 연구를 하고 있다. 인신매매 문제, 필리핀 이주여성과 그 자녀들을 지원하는 NGO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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